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로트(룩셈부르크) (문단 편집) == 상세 ==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와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의 공주인 마리 안 대공비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래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을 취하고 있었으나 기욤 4세가 슬하에 여섯 자매를 두었을 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907년]]에 장녀 [[마리아델라이드]]를 후계자로 정했다. [[1912년]]에 아버지 기욤 4세가 사망하면서 언니인 마리아델라이드가 18살의 나이로 대공위를 계승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군|독일 점령군]]에게 친화적인 행보를 보여 민심을 잃고 퇴위를 강요받았다. 이에 샤를로트가 1919년 [[1월]]에 자녀가 없는 언니를 대신해 룩셈부르크의 여대공이 되었다. 샤를로트는 언니와는 달리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며, 1919년 [[9월 28일]] 공화국/군주국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77.8%의 지지를 받아 군주제의 기반을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다.[* 참고로 공화제 19.7%, 대공 교체 1.5%, 왕조 교체는 1.0%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같은 날 치러진 경제동맹을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와 맺을지 [[벨기에]]와 맺을지에 대한 국민투표에서는 73%가 프랑스를 선택~~했지만 실제 경제연합은 1922년 벨기에와 맺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연합)~~] [[1919년]] [[11월]]에 부르봉-파르마 공가([[보르본 왕조]]의 방계) 출신이자 이종사촌이기도 한 펠릭스와[* 이모 마리아 안토니아와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의 남동생이다.] 결혼해서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이 결혼으로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경칭이 HGDH(Grand Ducal Highness)에서 HRH(Royal Highness)로 승격되기도 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침공하자 룩셈부르크 대공가와 정부는 프랑스, [[포르투갈 제2공화국|포르투갈]],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망명하였다. 나치 독일은 나치에 협력하면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복귀시켜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여대공은 이를 거절했다. 이 와중 1942년에는 헝가리에 망명해 있던 둘째 여동생 바이에른 왕세자비 안토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가족들이 캐나다에 있는 동안 샤를로트 여대공 본인과 룩셈부르크 망명정부는 1943년 [[영국]] [[런던]]으로 이동했고 BBC에서 정기적으로 나치에 대한 레지스탕스 라디오를 방송했다. 이후 나치 독일이 패망한 [[1945년]] 귀국하였다. [[1964년]] 11월 장남인 [[장(룩셈부르크)|장]] 대공에게 양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