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샹중파 (문단 편집) === 체포와 처형 === 왕밍 일파의 공산당 권력 독점은 격렬한 반발을 샀다. [[허멍슝]]이 이끄는 노조 출신 간부 25명은 왕밍 일당을 반대하는 회의를 열다가 내부자의 밀고로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어 전부 총살형에 처해졌다. 또한 뤄자룽(罗章龙)이 이끄는 중앙위원 30여 인이 상하이에서 '중공 중앙비상위원회'를 조직해 왕밍이 장악한 공산당과 맞섰다. 그 결과 상하이를 포함한 많은 도시의 노동조합 활동이 침체되었고 공산당의 역량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권을 잃은 샹중파는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부유한 골동품상인으로 분장하여 프랑스 조계지의 선종로 부근의 3층집을 공산당 후원금을 통해 구입하고 기생 양슈전과 부부 명의로 동거했다. 양슈전은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샹중파의 진짜 신분도 몰랐다고 한다. 샹중파는 공산당 경비대장 구순장(顾顺章)으로부터 양슈전을 소개받았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하녀도 구순장이 소개시켜줬다. 그런데 바로 그 구순장이 변절해 공산당원 체포대장이 되었다. 이에 당 중앙은 샹중파를 장시성의 중앙 소비에트 구역으로 이전시킴으로서 국민당의 추적을 회피하게 했다. 저우언라이는 샹중파가 장시성으로 갈 진로를 짜는 동안 샹중파를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의 집으로 보내 외출을 삼가하게 했다. 이윽고 노선을 다 정하고 호송인원도 선발한 저우언라이는 샹중파에게 즉시 출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샹중파는 떠나기 전에 양슈전과 꼭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양슈전이 이미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만류했고 덩잉차오도 "조직에서 상하이를 떠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당신은 말이 너무 많아요!"라고 꾸짖었다. 이에 샹중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저우언라이의 숙소에서 사흘을 지냈다. 그러던 6월 21일 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샹중파에게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샹중파는 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몰래 양슈전이 있는 여관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음날 9시까지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구순장의 밀고를 받은 국민당 체포 조직원들은 샹중파가 양슈전과 작별하려면 꼭 거치는 탄러 자동차점에 매복했다. 이윽고 6월 22일 오전 9시, 샹중파가 나타났다. 탄러 자동차점의 점원 예륭성은 샹중파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었고 체포 조직원으로부터 거액의 포상금을 약속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샹중파가 예룽성에게 차를 요구하자, 예룽성은 휘파람을 불었고, 체포 조직원들은 즉시 달려들어 샹중파를 포박해 순찰대로 끌고 갔다. 그날 정오, 저우언라이는 샹중파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샹중파는 체포된 지 불과 하루만인 6월 23일 전향서를 작성하고 천충잉(陳琮英)과 양수정(楊秀貞)의 위치를 털어놨고, 두 사람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또한 체포 조직원들은 샹중파로부터 저우언라이의 주소를 전해듣고 샹중파를 앞세워 저우언라이를 체포하려 했지만, 저우언라이가 이미 낌새를 채고 달아났기 때문에 잡지 못했다. 당시 루산에서 휴양 중이던 장제스는 샹중파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총살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1931년 6월 24일, 샹중파는 처형되었고 시신은 극비리에 소각처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