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강대학교/여담 (문단 편집) == [[배구]]부의 전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oganglegend.jpg|width=100%]]}}}|| ||<:> {{{#fff '''서강대학교 배구부의 경기 모습'''}}}|| '''한국 학원 스포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그러나 학교 수뇌부에 의해 안타깝게 쓰러진 [[이 xx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전설]]''' 서강대에 정식 운동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서강대 출신 중에서도 [[배구]]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하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에는 정식 운동부로서 배구부가 있었다. 돌연 해체되면서 전설로만 남아버렸지만, 당시 서강대 배구부는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했을 정도로 우수한 기량을 뽐냈다. 제3~4대 총장으로서 재직 중이었던 스킬링 스태드 신부는, 재학생들의 애교심과 자부심을 고취하고 서강인의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구]]부 창단을 결심했다. 감독에는 [[이근삼]]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코치에 이용관 前 국가대표[* 1989년 명지대 배구부 재창단 시 합류해 1999년까지 초대 감독을 지냈다.]를 임명했다. 창단 당시 일부 학생들은 서강대에 운동부가 창단됨으로써 기존 대학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병폐가 서강대에도 전염돼 서강대의 학문 전통에 누를 끼칠까 우려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거액을 들여 선수를 스카우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들은 교칙에 의한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학사규정을 지켜야 했다. 덕분에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대학원에 재학 중인 선배들로부터 공부 지도를 받아야 하고, FA를 걱정하거나 [[독후감]]을 쓰느라 낑낑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배구부 학생들이 졸업장을 받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서강배구부 출신인 [[박주점]](경영학과) 現 KOVO 경기감독관[* 前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한국도로공사 여자배구단]] 감독(2007~2009), [[고려증권 배구단]] 선수.]은 "당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고 회상하며 "팀을 운영하고 선수들은 지도하면서 그 당시 [[경영학]]을 공부한 덕을 보고 있다. 모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오늘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발편이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었다.~~오오 완전체~~ --근데 사실 도로공사 감독 시절 성과를 낸 게 별로 없었다는 게 함정.-- 학업과 운동 모든 면에 충실할 것을 강요받은 서강 배구부는 창단 첫해부터 좋은 성적을 올렸다. 제36회 전국 종별 배구선수권 대회 대학부 3위 수상을 시작으로, 1983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8회 전국남녀종별 배구연맹전에서 다시 3위를 차지했다. '''[[서울대]] 배구부와의 친선경기'''는 학생들의 열띤 성원 속에서 치러졌고, 해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기량은 향상되어갔다. 마침내 배구부는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1983년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 11회 체육부장관기쟁탈 전국대학배구선수권대회에서 4전 전승으로 우승한 것이다. 지적 활동과 스포츠 활동을 조화시켜 대학스포츠의 새로운 풍토를 조성한다는 취지 아래 창단된 서강대 배구부의 우승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서강대 배구부의 전설은 어이없게 사라지고 말았다. 기량이 향상되어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자 점차 배구부원들은 "우리도 다른 학교처럼 좀 예외로 쳐주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요구[* 특히 FA 제도로 대표되는 빡쎈 출석 규칙을 완화해 달라는 요구가 가장 컸다고 한다. ~~독후감까진 안 바랍니다. 경기 출전하게 출석만이라도 빼주세요~~] 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 학교 측에서는 '''"그래, 그런 소리 할 거면 아예 사라져라"라고 하며 없애버린 것이다.''' 위와 같이 간단히 해체된 것은, 당시 외국인 [[신부(종교)|신부]]들의 학내 입지가 약화되면서 그 지원 아래 운영되던 배구부의 입지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선수들은 다른 대학으로 이적했으며[* 대표적으로 [[경기대학교]]로 간 --북두-- [[이상렬]](금성. 前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KB손해보험]] 감독)과 김은석([[고려증권 배구단|고려증권]]), 한양대로 간 최영준(금성).], 나머지 선수들은 너무나 어이없고 안타깝게도 배구선수의 꿈을 접은 채 학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홍성진 前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前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현대건설]] 감독)이 이때 일반 학생으로 남은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박주점]] 前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감독은 서강대에서 학업을 마친 뒤 [[고려증권 배구단]]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http://www.cool2.com/bbs/view.php?id=kitten_bbs&page=8&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asc&no=99|#]] 지금의 후문 쪽 국제학사 자리가 이전에는 생활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배구부 숙소였다. 결국 서강대의 자랑이자 대학 운동부의 특이 케이스였던 서강대 배구부는, 공부와 운동 모두에 능한 운동부가 있었다는 전설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