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경(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서경은 고려 삼경(三京)[* 중경 [[개경]], 서경 [[평양]], [[동경(고려)|동경]] [[경주시|경주]] 혹은 [[남경(고려)|남경]] [[한양]].] 의 하나로서 현재 [[평양시|평양]]의 고려시대 명칭이다. 평양이 개성의 서북쪽이라지만 서쪽보단 북쪽에 더 가까운데도 [[북경]]이 아닌 서경이라 이름지은 이유에 대해 [[주보돈]] 교수는 이미 [[신라]] 때부터 경주를 동경이라는 별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경주를 동경이라 부른 건 고려시대 한정으로 알려져 있지만,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200_0030|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이나 [[처용가]] 등의 사료를 보면 이미 통일신라부터 경주를 동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만 신라 시절의 동경은 [[당나라]] [[장안]]을 서경으로 보고, 한국(신라)을 중국(당)과 대등한 문명국이라는 의미로 경주를 동경이란 별칭으로 불렀다고 했다. 고려시대의 동경과 이름은 그대로지만 의미는 달라진 셈.] 고려에서도 경주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이렇게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를 동경이라 부르는만큼 엄연히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통합했다는 입장인 고려 정부가 신라의 옛 수도인 동경과 대등하게 대비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이름붙였다고 주보돈 교수는 추정하였다.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의 땅에는 3경(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西京)이 된다.''' 11월·12월·정월·2월에는 중경에 거주하고, 3월·4월·5월·6월에는 남경에 거주하며, 7월·8월·9월·10월에는 서경에 거주하면 36개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개국하고 160여 년 뒤에 목멱양에 도읍을 정한다.’라고 하였으니, 신(臣)은 지금이 바로 새 도읍을 돌아보시고 거기에 거주하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 >- [[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122_0010_0020_0010|김위제가 『도선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건의하다]] (고려사 > 列傳 卷第三十五 > 方技 > 김위제 > 김위제가 『도선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건의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시대 당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도선|도선대사]]가 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내용에서 그 연유를 추정 할 수 있는데 [[숙종(고려)|숙종(肅宗)]] 원년인 1096년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천도를 주장할 때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도선기(道詵記)」에는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고려시대때 평양을 서경이라 칭한것은 '도선비기(道詵秘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태조(고려)|태조]]는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을 옮겨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분사제도를 시행해 조정의 일부를 서경에 놓기 시작한다. 서경은 그 후 줄곧 중요 시설과 기관이 설치되고 풍수지리, 도참설에 따라 역대 임금이 [[장락궁]]에 행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