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동요 (문단 편집) == 서동 설화 == [[백제]] 사람인 가난한 서동은 [[마(식물)|마]]를 캐면서 살았기에 맛동이라고 불리었는데, [[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이 불순한 노래를 부르게 하여 헛소문을 퍼트린다. 소문 들은 왕은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낸다. 결국 서동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자신이 퍼뜨린 소문대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선화공주는 쫓겨나올 때 가져온 금을 떼어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고, 이를 안 서동은 마를 캘 때 나온 금이 산더미만큼 있다고 하고는[* 그 전까지 서동은 금의 가치를 몰랐다. 때문에 선화공주를 통해 금의 가치를 알기 전까지 금을 쌓아만 뒀던 것. 다만 선화공주를 꼬시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여론전 기술을 선보인 서동이 과연 정말 그게 금인 줄 몰랐을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저는 마나 캐고 살던 무지랭이입니다'라는 캐릭터를 고도로 유지하고자 한 것일 가능성 있음.] 왕에게 인증까지 했다. 그리하여 서동은 어찌어찌 해서 금도 얻고 인심도 얻어 백제의 왕이 되고,[* 근데 이 부분부터 잘 살펴보면 뭔가 이상하다. 가난하게 살고 있던 백제 서민이 신라의 공주와 결혼해서 부자가 되는 시나리오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 왕이 된다면 당연히 아내랑 연이 있는 신라 왕이 되어야지 뜬금없이 백제 왕이 되고 있다. 딱히 서동이 백제 몰락 왕족이라든가 하는 언급 하나 없는데도 말이다.] 결국 선화공주와 함께 [[미륵사]](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주석이 있다.]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설화의 전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와 서동 설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사]]》[* 俗號末通大王陵,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 권57(지(志) 권제11) > 지리2(地理 二) > [[전라도]] > [[전주시|전주목]] > [[금마면|금마군]] 항목.][[http://db.history.go.kr/id/kr_057r_0010_0020_0020_0010|#]] 《[[세종실록지리지]]》[* 在郡西北五里許, 谷呼武康王爲末通大王.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익산군][[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01_003|#]]에는 "말통(末通)대왕"이란 명칭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바로 "薯童"을 훈독한 "맛둥" 정도의 어휘를 적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학문적 가치와는 별개로 내용 자체가 미천한 신분이던 자가 공주를 만나 왕이 되어 잘 살았다는 [[입지전적]]의 이야기로서 천 년도 넘는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중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향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