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서력기원 (문단 편집) === 서력기원 유래와 발전 === 서기 [[525년]],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라는 소스키티아(Scythia Minor)[* 오늘날 [[루마니아]] 남동쪽 [[흑해]]에 면한 도브루자(Dobruja) 일대를 말한다.] 출신 동로마 [[수도자]]가 교황 [[요한 1세]]에게 요청을 받아 서기 532년부터 626년까지 95년간의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여 표를 만들었다. 디오니시우스 전에도 부활절 계산표는 있었지만, 동방에서 만들어 연도를 주로 순교자기원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디오니시우스는 근거를 밝히지 않고 '''로마기원(AUC) 754년을 예수의 탄생년으로 잡아''' 자기가 만든 부활절 계산표에서 연도를 표기하는 기준으로 처음 사용했다. 디오니시우스가 순교자기원을 거부한 이유는 박해자 황제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도를 표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교회는 그가 제작한 표를 받아들였어도 연대를 적는 방법까지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력기원은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대중화되지 못했다. 서기 691년 [[정교회]]권에서는 창세기 내용을 따져서 세계가 창조된 해라고 생각한 기원전 5509년을 원년으로 삼는 '[[우주력]]'을 사용하였고, 988년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공국]]은 우주력을 공식 연호로 채택하기도 했다. 서력기원이 비로소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8세기]]'''부터였는데, [[영국]]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당대의 저명한 학자인 '''[[베다(역사가)|가경자 베다]]'''(Venerable Bede)가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만든 부활절 계산표를 디오니시우스의 방법에 따라 이후의 시대까지 확장하여 725년 저서 《시기계산론De temporum ratione》에 수록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당연히 그는 디오니시우스가 만든 '서력기원'을 잘 알고 또 익숙했다. 베다는 731년 즈음에 탈고한 저서 《[[앵글로색슨족|앵글족]] 교회사》[* 베다는 라틴어로 책을 썼다. 《앵글족 교회사》 역시 원제는 라틴어로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앵글 민족 교회의 역사)이다. 우리말 서적에서는 이 책의 제목을 '잉글랜드 교회사' 또는 '영국 교회사' 등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를 집필하며 서력기원을 채택했다. 물론 다짜고짜 서기로 연대를 표시하면 당대의 독자 대부분이 감을 잡지 못할 테니, 책의 첫 부분에서 잠깐 AUC와 서기를 병행하다가 이후로는 서기만 사용하였다. >Verum eadem Brittania Romanis usque ad Gaium Iulium Caesarem inaccessa atque incognita fuit; qui anno ab Urbe condita DCXCIII, ante vero incarnationis Dominicae tempus anno LXmo, functus gradu consulatus cum Lucio Bibulo.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키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이던 때, (로마) 도시가 세워진 지 693년, '''주께서 육화肉化하시기 60년 전까지''' 브리타니아는 로마인들이 온 적도 없었고 전혀 알려지지도 않았다.[* 베다는 이 부분에서 4세기 초 사람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의 오류 많은 저작을 보고 쓰느라 잘못된 정보를 기술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로마기원 693년, 즉 기원전 61년에 루키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고 브리타니아를 공격했다. (베다는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공격함으로써 비로소 로마인들이 영국 땅을 밟았다는 전제로 서술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처음 집정관이 된 때는 기원전 61년이 아니라 기원전 59년이었고, 함께 집정관으로 당선된 이는 루키우스 비불루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마르쿠스 비불루스]]였다. 또한 카이사르가 처음 브리타니아를 공격한 때는 기원전 55년이었다.] >---- >《앵글족 교회사》 1권 2장 첫 머리에서 베다는 《앵글족 교회사》에서 서기를 사용하며 Anno ab incarnatione Domini(주의 육화肉化한 이래의 해), 또는 Anno incarnationis Dominicae(주의 육화肉化의 해)라고 표현했다. 역사서에 처음으로 서기를 도입해서인지 표현도 고정하지 않았고 줄임말도 쓰지 않았다. 베다의 책을 읽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서기는 참신하면서 또 편리해 보였던 모양이다. 영국의 [[베네딕토회]] [[수도자]] '''[[알퀸]]'''(Alcuin of York)은 베다가 사망한 해(735)를 전후한 무렵에 태어난 사람으로, 생전에 베다를 만난 적은 없지만 같은 [[노섬브리아]] 출신이었으므로 베다의 저작을 읽고 명성을 익히 들었음이 분명하다.[* 알퀸에게 학문을 가르친 선생들 중에는 베다의 제자도 있었다고 하므로 모를 리가 없었다.] 알퀸은 훗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카롤루스 대제]] 곁에서 최고 자문위원 노릇을 했는데, 아마도 800년 즈음에 서력기원으로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을 그의 [[조정#s-3|조정]]{{{-2 (朝廷)}}}에 알려주었다. 카롤루스로부터 [[카롤루스 왕조]]가 서기를 사용했던 것이 유럽에서 서기가 퍼지는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 서기는 이렇게 영향력을 넓히다가 11–14세기쯤에는 서유럽에서 대중화되었는데,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포르투갈]]이 마지막까지 별개의 연대표기방법을 사용하다가 1422년에야 겨우 받아들였다. 서기가 서유럽에서 대중화되는 와중에도 [[기원전]] 시대까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년 전'이라고 기술하는 방식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베다(역사가)|가경자 베다]]가 이미 《앵글족 교회사》에서도 '주께서 육화하시기 전'이라는 표현을 한 번 사용했는데도 말이다. 서력기원 이전 시대도 서기 원년에서 거슬러 세는 방식을 대중화한 서적은 17세기 프랑스 [[예수회]] 신학자 겸 역사가인 데니 페토(Denis Pétau)가 1627년 출판한 《시대주장론De doctrina temporum》이라고 한다.[* 데니 페토와 동시대, 또는 이전 시대의 다른 서유럽 학자들의 책을 보면, 기원전을 논하면서 로마기원(AUC)이나 창세기원(Anno mundi)을 병용하기도 하였다.]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로는 정교회권도 점차 서력기원으로 대체되어 1728년에 이르자 우주력을 버리고 서력기원만을 사용하였다. 이후 식민지 개척과 함께 비그리스도교권에도 퍼져 서력기원이 지구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연호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