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복 (문단 편집) === 한국과 일본에서 === * 중국 동쪽 바다로 불로초를 찾아나섰다는 전설 때문에 실제로 중국 동쪽에 있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해안가 지역에는 서복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많이 있다. 한국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일본은 [[사가현]]에 서복 전시관이, [[와카야마현]]에 서복공원과 서복의 무덤이 있다. * [[서귀포시]](西歸浦市)는 도시 이름부터가 서복이 서(西)쪽을 향해 귀로(歸路)에 오른 포구(浦)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며,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많고 중국인들 중 진시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보니 중국인 관광객이 오면 서복과 불로초 일화는 관광 가이드의 멘션에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 실제로 제주도에 --귤은 자라도--불로초가 자라는 건 아니지만[* 다만 한국의 [[삼신산]] 개념에서 [[한라산]]에서 자라는 지초(芝草), 즉 [[약초]]를 삼신산 불사약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런 전설이 있을 정도로 제주도가 땅좋고 물좋은 청정지역이다라는 식으로 마케팅에 활용한다. * [[정방폭포]]에는 서복이 다녀갔다는 의미의 서불과지(徐巿過之)는 글자가 폭포 옆에 새겨져 있다. 이 글자 자체는 2000년대 초에 중국인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주변 정리 사업을 할 때 새긴 것이며 원래는 폭포 절벽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2011년에 서귀포에서 글자를 찾아보겠다고 폭포 주변을 정밀 탐색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서귀포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이 글자를 탁본으로 남겨놨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현재 탁본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아있으며 정방폭포와 서복전시관에 있는 글자는 이 사진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구한말 제주 향토학자인 [[http://www.grandculture.net/jeju/toc/GC00700376|김석익]]이 1921년에 저술한 파한록에는 "1877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백낙연(白樂淵)이 순시 중 정방폭포에 들렀을 때 서복 전승을 듣고 사람을 시켜 탁본을 했는데 올챙이, 벌레, 새 모양과 비슷한 12개의 글자였으며 중국의 고대 문자여서 해석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원본 글자가 근래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제주도 외 한반도 본토 지역에도 서복 전승이 있는데 [[거제시]] [[해금강]]에는 서복이 이곳에 잠시 머물 때 남겼다는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자가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남해군]] 이동면 [[금산]](錦山)에도 서불과차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금산에 있는 글자는 서복 전승과 관련된 것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인데 다만 이것이 "글자"인지 "그림"인지 불분명하며 글자라고 해도 서불과차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글자의 전체적인 모양 자체는 김정희의 탁본 사진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일단 남해군은 서복과 관련이 있다 보고 계곡 입구에 서복상을 세워두었다. 한편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봉래산]]에도 서복 관련 전승이 있다. * 일본의 경우, 소설 <춘설궁장월>에는 서복이 [[하치조지마]]에 남여 1000명을 데리고 상륙해 불로초를 찾으러 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쿠마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lyjuny3365&logNo=13002201089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