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북군벌 (문단 편집) == 국민군 계열 ==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에 [[직예군벌]]의 육군검열사이자 3로군 총사령관이었던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독립한 계열이다. 북경정변 이후 펑위샹이 국민군을 조직하였기 때문에 국민군벌이라고도 하며 펑위샹의 성을 따서 풍계군벌이라고도 한다. 1924년, 펑위샹은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핍박하여 하야시키고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과 손잡고 [[우페이푸]]를 축출했다. 펑위샹은 과거 하남독군 시절부터 매춘, 아편매매, 전족을 금지시키는 등 개혁적 성향을 가진 군벌로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나라 소조정]]을 해산시키는 등 구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펑위샹은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하는 등 남방의 [[중국 국민당]]에 친화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장쭤린]]이 초빙한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임시 집정에 취임하면서 돤치루이 정부를 지지했다. 돤치루이 정부는 펑위샹이 지배하고 있던 베이징에 위치했기 때문에 펑위샹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직봉전쟁 이후, 장쭤린이 장강 이남 지역으로까지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펑위샹과 장쭤린과의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1925년 [[손봉전쟁]]으로 장강 하류에서 봉천군벌의 세력이 축출되자 펑위샹은 봉천군벌의 개혁파인 [[궈쑹링]], 비주류 [[리징린]]과 손잡고 장쭤린에 대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궈쑹링이 일으킨 [[반봉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군 산하의 손악와 호경익이 하남성의 [[우페이푸]] 세력과 무단으로 교전하면서 펑위샹은 [[우페이푸]], [[장쭤린]]의 연합군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산서군벌 [[옌시산]]이 반풍 전선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6년에 이르러 돤치루이마저 펑위샹을 적대하려 하자 펑위샹은 [[대고구 사건]]을 구실로 돤치루이를 압박하여 하야시켰으나 [[직봉풍전쟁]]이 발발하면서 펑위샹은 베이징을 버리고 섬서, 감숙, 청해의 오지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근거지를 서북으로 옮기게 되었다. 펑위샹은 이 시기부터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며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였고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고 [[국민혁명군]]이 호북, 산동까지 진격하자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관에 취임함으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우한과 난징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1927년 쉬저우 회담 이후 [[장제스]]와 손잡고 [[왕징웨이]]에게 공산당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하지만 [[편견회의]]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장제스에게 불만을 품고 [[1차 장풍전쟁]],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켜 [[반장전쟁]]에 참여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옌시산]]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펑위샹은 리쭝런과 함께 장제스에게 대항하였지만 또다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펑위샹은 군권에서 물러나며, 실제로 서북 군벌은 타 지역으로 분할되거나,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조직으로 흩어지게 된다. 한푸쥐의 경우, 장제스에게 투항하여 산동군벌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쑹저위안, 친더춘, 풍치안, 장자충 등은 하북, 차하얼을 중심으로 하는 기찰정무위원회를 조직하여 하북군벌로 정착한다. 한푸쥐는 장제스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으나 기찰정무위원회는 국민정부와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반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