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북청년회 (문단 편집) == 설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wG7bdQ.jpg|width=100%]]}}} || || '''"국제 조약의 배신자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당장 한국에서 꺼져라!"''' || ||<#EAEAEA,#2D2F34> '''초기 서북청년단의 강령''' || ||1.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2. 균등사회의 건설|| ||3. 세계평화에의 공헌|| > '''마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와 [[쿠 클럭스 클랜|KKK]]를 합친 것 같다.''' >---- >'''[[미군정|미 군정청]]'''[[https://m.khan.co.kr/amp/view.html?art_id=201807012211005&sec_id=210100|#]][* 그런데 링크한 기사에 실린 194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서북청년단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미군정 장교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서북청년단원들 중에서 중학 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대부분은 단지 소학교를 다녔던 것에 불과하고, 부잣집의 아들이거나 성공한 집안의 자손은 없었고, 북한에서 고작 [[머슴]] 일을 했을 뿐이며, 정치적 이익보다는 경제적 이유를 위해 남한에 온 것이 명백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주도 출신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서북청년단원들은 제주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엿장수 같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천한 일이나 전전했으며 한자 [[오얏 리]](李) 자를 [[두 이]](二) 자로 잘못 쓸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https://smilewith.tistory.com/3294|#]]]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평안도]]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년단체(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들이 모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에서 창단된 단체이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우기성을 선출했고, 중앙집행위원장 외에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가 설치되었다.[[http://library.konkuk.ac.kr/pyxis-api/1/digital-files/1f0d760f-dceb-48f7-8e97-a2bbed761db9|정종식,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 이들은 주로 북측 지역에 거주했던 몰락 [[지주]] 출신이나 [[개신교]] 신자,[* 이 때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국가 무신론]]을 채택해 모든 종교를 탄압했고 북한 정권도 당연히 그러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에 있던 모든 한족 출신 지주들과 부자들을 가족까지 잔인하게 모두 죽인 것처럼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도 지주와 부자들을 지속적으로 숙청하였다. [[한국의 개신교]] 교인들 특히 보수성향 신자와 목사들이 현재진행형으로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해서 듣기만 해도 분개하는 이유는,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이 개신교도들을 국가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이다.],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북한]]의 탄압을 피해서 도망온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주나 친일파 출신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조선에서 가장 [[개신교]] 신자 비율이 높았다. 해방 직후 뿐 아니라 20세기 초부터 개신교 신자 비율이 매우 높았다. 때문에 한때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부분 영락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사이비 계열도 아니었으며, 이들의 악행이 개신교 교리나 전도를 목적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기에 광신자도 아니다. 서북청년단이 해체된 후 다양한 정통 개신교 교단으로 흩어져서 목사가 되었지만 악행을 이어가진 않았다.] 당시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주로 하였고 만인평등사상을 내세워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으며, 이들은 김일성과 소련군정으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박해를 받고 살인을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러한 심각한 박해를 받고 나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내던지고 서북청년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출처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교수] 서북청년회실제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 소련군정의 [[개신교]] 박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단순히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살인도 당했다. 대표적인 개신교인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한국전쟁 전에 고려호텔에 연금됐던 것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탓에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는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죄다 월남해버려 숙청하려야 숙청할 사람이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1949년 [[백범]] [[김구]]를 암살한 범인 [[안두희]]도 젊은 시절 이곳 정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면모만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 서북청년회의 구성원에 대부분이 당시 가난했던 개신교도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만 국한에서 보면 "서북청년회가 어떻게 이런 악행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나온다. 실제 대다수 소속원은 [[공산주의]]에 이가 갈린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의 북한 진주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권은 자산가, 종교인 위주로 수많은 탄압 행위들을 감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이 전부 살해당하고 재산을 전부 잃고 혼자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이 공산당에 의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빈털터리로 월남한 신세니 이들은 뼛속까지 공산당에 대한 증오로 가득할 수 밖에 없었다. 상술했듯 그저 [[종교]]와 [[이념]]으로만 서북청년회를 바라보면 지금껏 이들이 자행한 끔찍한 만행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복수귀]]가 되어 저지른 모든 일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어쨌든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반공 정권의 눈에는 이들보다 써먹기 좋은 도구는 없었다. 빨갱이 프레임 하나만 잘 씌워주면 이들은 정치권이 직접 할 수 없는 더러운 짓을 알아서 도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일이 좀 지나치거나 무언가 어긋나서 잡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냥 버려버리면 그만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원들을 군대와 경찰에 대규모로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군대에 6500명의 서북청년단원들이, 국립경찰에 1700명의 서북청년단원들이 들어갔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0520#0DKU|#]]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