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북청년회 (문단 편집) === 활동 이후 [[숙청]] ===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보면 서청의 활동상이 나와있다. 서북청년단은 정부수립 이전에 계림공작대라는 조직을 두고 독자적으로 대북공작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 조직은 정부수립 이후에 국방부와의 협력으로 호림부대라는 특수부대로 재편되어 북파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결국 [[한국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그나마 운 좋은 경우에는 약간의 훈련을 거친 후에 예비역 장교 신분으로 [[국민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에 배정되기도 했는데 이들조차도 후에 군인들을 굶겨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이후 지향점을 잃어버린 이들은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서청단 출신 인물들은 군에 들어갔는데, 군사적으로 크게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고지전에서 일반 전투원으로 투입되어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자들은 전역하여 남한에 정착했다. 서청의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서북청년단 출신자들은 특별한 보상도 없이 버림받았다. 남한군 예비역 육군 대령이자 언론인, 작가의 길을 걸었던 [[선우휘]]는 출신에도 불구하고 서청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쪽은 오히려 같은 서북출신 [[장준하]]가 창간하고 서북출신 엘리트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잡지 [[사상계]]쪽 인사들과 가깝던 편이었다. 하지만 같은 서북 출신이라는 굴레때문인지 이들도 대체로 서북청년단에 대해 반감보다는 오히려 공산주의를 상대로 열심히 싸운 같은 고향출신 투사들이라는 식으로 바라보는 지역적 한계를 띄기도 한다. 사실 서청처럼 대놓고 폭력을 지향하지만 않았을 뿐, 이들도 대체적으로 반공 성향에다가 서청출신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공산당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인지라 오늘날에 비해 다소 옹호하는 시선을 띄는 건 어째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은 대부분 서청 출신으로 쓸쓸히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가 진정으로 [[동인문학상]]을 주어야 할 작품이라 평한 "테로리스트"나 자신이 대령으로 등장하는 "오리와 계급장"이 대표적이다. 서청 간부이고 유엔군의 북한 통치시기 [[이승만]]이 임명한 [[평안도]] 지사 대신 미군정에 임명돼서 벼슬을 한 김성주[*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과는 동명이인이다. 서북청년단 내에서 서열 2위인 부단장을 한 인물인데, 서북청년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아 그 이력이 불투명하다. 다만 평안북도 출신이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는 이렇게 버려진 대표적 케이스, 그는 후일 반 이승만 음모혐의로 사형당한다.[* 다만 김성주가 완전히 억울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승만한테 버림을 받은 이후로는 복수를 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UN군]]에 줄을 대어 UN군에 의해 평안남도 지사로 임명되어서 이승만이 [[평안남도]]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보낸 사람들을 모두 쫓아냈으며 심지어 이승만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아서 이승만이 크게 분노했다. 일설에 의하면 김성주가 UN군의 힘을 빌려 이승만을 쫓아내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음모를 꾸몄으며, 그래서 이승만이 김성주를 더욱 미워했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 지역으로 쳐들어오자 김성주는 얼른 남한으로 피신했으나, 이미 이승만으로부터 미움을 샀던 터라 처신이 무척 어려웠는데, 마침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의 선거 캠프로 들어갔다. 평화주의자인 [[조봉암]] 본인은 서북청년단 간부로 있으면서 온갖 폭력을 휘두른 김성주가 못마땅했으나, 자신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이승만 진영의 공격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삼기 위해서 김성주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성주는 조봉암 선거 캠프에 있으면서 술만 마시면 "내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다 알고 있다! 여차하면 다 불어버리겠다!"라고 소리쳤고, 백범 김구 암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승만은 이렇게 자신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김성주를 끝내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정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김성주 본인은 원래 백범 김구를 죽인 암살범 [[안두희]]가 애국자이니 석방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사람이었던 것(...).][* 사실 백범 김구와 서북청년단의 관계는 [[1948년]] [[장덕수]]가 암살되면서 김구가 우익진영에서 고립되자 정치적 노선을 바꾸어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굉장히 돈독했었다. 김구 본인도 이들을 신탁통치와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애국청년들이라고 치켜세워줬을 정도. 이때문에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을 때 당대의 몇몇 사람들은 김구 본인이 부추기고 키워준 서청 출신에게 발등을 찍혔다고 반응을 하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고문치사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만 재판부는 애초에 죽일 생각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살인죄로 규정했다.] 시체를 '''헌병 사령관 집에 유기해버리고 사형 판결과 집행을 이전에 한 것처럼 날짜조작을 해버렸다.''' [[4.19]] 이후에나 진상이 공개되고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김성주의 억울함을 증명한 건 진보 세력이었던 민주당이었다. [[제3보병사단]]이 '백골부대'로 불리게 된 연유를 제공한 것도 서청 단원들. 정확히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제18보병여단|제18연대]]에 자원입대한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고향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방탄모|방탄헬멧]]에 백골을 그려넣자 이내 18연대의 유행이 되어 급기야 연대 자체가 백골부대로 불리었고, 이후 [[흥남철수]] 과정에서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는 바람에 소속이 바뀌었다. 그 후 휴전이 되어 여력이 생기자 사단명칭을 보다 전투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단장의 의지에 18연대 명칭이 사단에도 적용돼 사자 부대에서 백골 부대로, 18연대 역시 자신들이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진백골로 바꾸었다. 게다가 1대대는 자신들이 그 중에서도 진~진짜 원조라며 명칭을 진진백골대대로 바꾸었다. 헌데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백골부대라는 호칭의 유래가 된 단체'로만 알고 있어서, 이들을 건전한 청년단체로 아는 경우도 있단다(…).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충공깽]]. 사실 같은 단체 소속이었다고 해도 때로 몰려다니며 사적 린치로 민간인이나 죽이는 위험분자들에 비하자면,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혼란시국에 고향을 되찾겠다고 제대로 된 군대조직에 몸담은 이들이 훨씬 제대로 된 사람인 것은 맞다. 이 밖에 월남한 이북 청년과 학생들의 생계를 돕는 지원사업을 했고,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 군정청 고위관리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기도 했고, 각 지방단의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여 자금화했다. 사실상 조직폭력배와 비슷한 셈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돈을 받아서 정치 깡패이고, 각 지방단 유지에게서 염출했다"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서청의 위치로 보면 거절할 사람이 없었을 것으로 사실상 강제로 삥 뜯은 것이고, 원조물자 유출은 당시 조직폭력의 역사를 다루면 빠지지 않는 유형이다. [[이승만]] 정권 때 개털이 됐고 이 때 살아남았어도 아마 몇년 뒤 [[박정희]]가 정권 잡고 나서 더 철저하게 숙청당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국시를 반공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반공을 내걸고 깡패짓을 하는 자들을 옹호하진 않았다. 이승만 시절의 반공이 반대세력들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패도 무죄가 되는 상황이었다면, 박정희와 그 이후 반공은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일단은 검경이 나서서 처리하는, 법과 질서에 의해 집행되는 반공이었기에 아무리 반공성향 깡패집단이라고 해도 관료들에게 뇌물 주고 음지에서 이득 챙기는 정도라면 모를까, 정치깡패를 자처하며 대놓고 나댈 수는 없었다.] 정치깡패들조차 또 다른 독재자의 눈에 들지 못하면 쉽게 숙청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