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시 (문단 편집) ==== 1980년대까지 ==== [[http://www.koreanwar2.org/kwp2/maps/l751/7900_s50_u5_6424_2_3000.jpg|한국전쟁 직전의 지도]] 및 [[http://www.koreanwar2.org/kwp2/maps/l752/7900_50_3019_1_1979_4000.jpg|한국전쟁 이후의 지도]](1979년도로 추정)를 보면, 시내 및 주변지역은 한국전쟁 때, 혹은 그 이전과 다를게 없다. 물론 [[2010년대]]에 들어 시내의 사이즈는 [[1979년]]의 4배가 넘게 커졌지만, 애초에 기초적인 시설은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은 과거와 그리 다를게 없는 현실을 알려준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수도권의 유행이 3년이 지나야 서산에 온다.'''는 말도 있었는데, 실제로 이러한 발전없는 실상 때문에 이는 당연한 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대통령이 서산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서울에서 서산에 오는 길은 오지게 빡센 길이었고,[* 조선시대 이곳은 괜히 '''유배지'''가 아니었다. 광화문에서 서산시 중심가까지의 직선거리는 100km에 불과하지만, 길이 없다시피 해서 1970년대 기준 [[용산시외버스터미널|서울]]행 [[시외버스]]가 5시간 반 정도 걸렸으며 이는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전까지 쭈욱 유지되었다. 특히 추석, 설날같은 대이동 때에는 답이 없었다. 지금은 빠르면 1시간에 끊을 때도 있으니 정말 격세지감.] 따라서 '''육군 공병대'''가 현재 서산터미널 앞을 지나가는 안견로와 서산의료원 앞을 지나가는 서해로의 일부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가장 큰 길이었던 649번 지방도(서령로)[* 서령고등학교 앞을 지나 부석으로 가는 도로]를 제치고 시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자, 각각 국도 29번과 32번의 연장이 되었다. 1980년대 말 시내에 흐르던 하천인 청지천(석림천)이 복개되고 양유정은 일개 공원이 되었다. 다만, 명지천(청지천, 석림천)이 1950년대 서울의 청계천같이 하수구 역할을 했기 때문에, 6.25 동란 이후 이미 양유정은 아름다운 별경 같은 의의를 상실했다. 그래도 지금도 고목공원이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남쪽으로 가려면 현재의 서령고삼거리를 지나서 가야 했고, 서울에 가려면 현재의 서령고등학교 앞을 지나쳐 가야 했다. 현재도 2곳 모두다 2차선인 채로 남아있으니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주민이라면 가서 구경해보자. 특히 서령고삼거리는 30년 전과 바뀐게 간판 밖에 없으며, 서령고등학교의 정면 만은 개교 당시와 '''똑같다.''' 2010년대 지어진 아파트가 보이지만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지울 수 있다. 참고로 [[서산초등학교]] 근처의 동문동과 읍내동의 경우 증언에 따르면 '''1930년대'''와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건물 높이도 똑같다고 한다. 실제로 바로 앞에 시장 가는 길을 보면 낙후되어 있는 게 온눈에 보이나 2017년에 중앙로의 전신주 지하화로 미관성이 어느 정도 나아보였으나 그것만 빼면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 [[서령고등학교]] 가는 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난개발이 많이 이루어져 지도에서 보기보다 상당히 낙후되어 보인다. 실제로도 서령고등학교 근처를 제외하면 버려진 시가지급으로 사정이 좋지 않다. 더욱이 안견로를 감싸고 있는 원도심 지역들은 4차로의 확장 또한 100% 불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