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 (문단 편집) === 회의의 소집 === 9월 18일 광저우를 출발한 린썬, 쩌우루 등은 9월 24일 상하이에 도착, 그곳의 중집위원들과 논의를 통해 베이징에서 사중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린썬과 쩌우루는 난징, 즈장, 우한 등을 돌며 세력을 규합한 후 경한철로를 따라 북상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린썬과 쩌우루는 베이징집행부와 접촉하여 베이징집행부 명의로 사중전회 소집을 통고하고자 했으나 베이징의 공산당원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에 린썬과 쩌우루는 분개하여 베이징집행부를 비판하는 한편 [[펑위샹]]의 힘을 빌리기 위해 장가구에서 사중전회를 소집하고자 했으나 펑위샹도 친소용공으로 돌아선 상황이라 소득이 없었다. 펑위샹의 지원을 얻기는커녕, 장가구에서의 안전 보장도 어렵게 되자 결국 베이징 서산에서 회의를 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설마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곳까지 누가 찾아와서 방해를 하겠냐는 것이었다. 이에 베이징집행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1월 15일 1차 회의가 소집되었고 11월 16일 서산에 모인 중집위원들은 연명으로 11월 23일 서산 벽운사에서 사중전회를 열겠다고 통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1월 18일 예비회의에선 온건파와 강경파가 크게 충돌했다. 온건파는 공산당 지도부와의 협상을 주장했지만 강경파는 이를 거부함은 물론 왕징웨이 탄핵 등을 내세우며 강하게 나섰다. 일단은 서산회의에 참여한 중집위원들은 광저우에 연락을 취하여 보로딘의 개조 이전 국민당에 여러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쑨원의 연아용공 정책이 국민당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인정하나 공산당원들의 부정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국민당이 공산당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했다고 보는것이 맞다고 비판하면서 광저우 동지들의 서산회의 참여를 호소했다. 하지만 광저우 측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서산회의가 연아용공 정책에 줄 영향을 우려하여 이들을 무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