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파 (문단 편집) === [[영한합작]] 시기 === 상하이 당중앙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정국은 1927년 4월 12일,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고조되던 가운데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급변하게 된다. 장제스는 난징의 친공 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체포한 다음, 상하이의 노동자 규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많은 공산당원들을 체포, 처형하였다. 이어 4월 15일 광저우에서 장제스에게 호응하는 [[4.15 광저우 쿠데타]]가 일어났고 우한 국민정부가 장악한 양호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숙청이 단행되었다. 1927년 4월 18일, 장제스는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우한 국민정부는 여전히 국공합작을 유지했지만 1927년 6월 1일, 스탈린으로부터 국민당을 장악하여 개조하라는 '5월 지시'가 내려오고 소련이 우한 국민정부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펑위샹이 난징의 편에 서자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도 분공을 결정하였다. 7월 13일, 공산당이 국민정부에서 선제탈퇴하였고 우한 국민정부도 반공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8월 13일 통합의 걸림돌인 장제스 하야 이후 두 국민정부가 합쳐지는 [[영한합작]]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서산회의파도 합류하여 1927년 9월 16일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설립하고 서산회의파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광동파, 광서파, [[후한민]]을 비롯한 친장 우파, 장제스 직속 황포계 군사실력자들, 왕징웨이의 [[개조파]] 등이 첨예하게 맞물린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고 [[장왕합작|광동파, 개조파, 장제스가 합작]]하여 장제스 복귀를 위해 서산회의파가 주도한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해체해버리면서 서산회의파는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거기에 서산회의파가 배후로 지목받은 난징 참안이 벌어지면서 서산회의파는 더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영한합작]] 문서와 [[국민당의 2차 북벌]]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