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상돈 (문단 편집) === 중장년 시절 === 1894년 서상돈은 [[조선]]의 탁지부 소속 시찰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담당은 경상도 세정의 총괄. 이 때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모습이 귀감이 되었다고 하는데 서상돈에 의해 파직된 부패한 [[아전]]들이 투서와 고발로 저항하자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로베르 신부가 증인으로 나서 이것이 거짓임을 증명해주었다고 한다. 1898년 서상돈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였다. 1899년을 전후로 해서 서상돈과 천주교 신자들은 대구 읍내 곳곳에 학당을 설립하였으며 [[계산성당]] 교육관 내 [[한문]] 서당인 [[효성초등학교(대구)|해성재]](海星齋)의 건립도 지원하였다고 한다. 1902년 6품으로 탁지부 재무관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9A_06A_00050_2006_194_XML|임용되었으며]], 이어 경상남북도 검세관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9A_07A_00110_2006_194_XML|임용되었다]]. 1903년에는 정3품으로 경상남도 시찰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10A_16A_00060_2006_198_XML|임용되었다가]] 곧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12A_10A_00190_2006_198_XML|해임되었다]]. 1904년에는 경상남북도 검세관에서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5A_16A_00090_2006_200_XML|해임되었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 사립 [[학교]]로 인가받은 대구 지역 대표 여학교인 달서여학교의 설립에 적극 관여하는 등 근대 [[교육]] 발전에 힘썼다. 1907년 서상돈은 "[[금연|담배를 끊고]], 비녀와 가락지를 내어 1,300만원 가량의 국채를 갚자"는 내용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며 즉석에서 800원의 거금을 출연했고 이에 대동광문회 특별회에 참가 중이던 200여 명의 회원들도 찬동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후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으나 [[일본 제국|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무산된다.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하여 실업 진흥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에 힘쓰다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돈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