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상용 (문단 편집) == 생애 == 서상용은 1873년 5월 16일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사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경에 간도로 이주했으며, 1911년 [[서일]] 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고, 1912년에 길림성 화룡현의 향정관(鄕正官) 및 덕신사(德新社) 사장 등을 역임했고, 1914년에 한족생계회(韓族生計會)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5년 광동학교(光東學校) 교장으로 부임해 교민 자제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쳤으며, 1918년 [[여준(독립운동가)|여준]], [[김좌진]], [[박찬익]], [[유동열]], [[신채호]], [[김동삼]] 등 38명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1919년 5월에는 대한군정사(大韓軍政司) 군사부 위원으로 부임했으며, 그해 11월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회장 임시 대리 및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 4월에 특파원을 국내로 파견해 군자금 및 장정을 모집했다. 1920년 10월에는 간도 소재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속으로 편입된 남부총판부(墾北南部總辦部)의 참사(參事)를 맡아 총판(總辦) [[구춘선]], 부총판 방우룡(方雨龍) 등과 함께 일했으며, 1922년에는 노령 화부성 한인조직부장을 맡았고, 1925년 한국독립의용군의 군사위원과 서무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29년 화부성의 한인정치학교를 수료했으며, [[만주사변]] 이후엔 중국 관내로 피신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에 충칭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했다. [[8.15 광복]] 후에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집권한 뒤 급격한 공산화가 이뤄지자 이에 반감을 품고 월남했으며, 1949년 2월부터 1960년 1월까지 [[함경북도지사]]를 지냈다. 이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 거주하던 중 1961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에 서상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길주군 출신 인물]][[분류:1873년 출생]][[분류:196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 [[분류:실향민]][[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