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상일 (문단 편집) == 친일반민족행위 == 2016년 8월 11일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1941년 12월 14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대구 신사에서 일제의 [[진주만 공습]] 성공을 경축하고 징병을 선동하는 대회가 열렸을 때 참석한 대표들 중에 서상일이 있었다. 또한 서상일은 1941년 10월 부민관에서 열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48894&categoryId=46623|조선임전보국단]][* 1941년 10월 22일 [[김동환(시인)|김동환]] 등이 주도해 만든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가 중심이 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등 두 친일 단체를 통합한 단체로, 1942년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 강화되자 이에 합류하면서 해체되었다.] 결성식에 참석했고 황국신민으로 일본 천황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일제의 전쟁에 적극 지원할 것을 결의한 임전보국단의 발기인 및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임전보국단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2009년 친일반민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또한, 1939년 8월 23일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서상일은 조선군 사령부가 주최한 병사 부장 회의에 대구 병사부 소속 대표로 참석했다고 한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erjay1&logNo=22078931448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또 1944년 9월 24일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에 이사로 참석하여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근로 협력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을 맹세하였다. 여기에는 서상일 외에도 [[윤치호]]·[[최린]] 등이 고문으로, [[여운형]]·[[최남선]]·[[안재홍]]이 내빈으로 참여하였으며 [[신태악]] 상무이사, [[이종린(1883)|이종린]], [[이종욱(정치인)|이종욱]]·[[장덕수]]·[[신흥우]]·[[김활란]] 등이 이사로, [[김성수(1891)|김성수]]·[[방응모]], [[이종만]]·[[박흥식]] 등이 감사로 참석하였다.[[http://db.history.go.kr/id/an_017_0560|박흥식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공판조서]][* 다만 이 명단은 단순히 이름만 올린 이들이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박흥식은 명백한 친일행위를 했음에도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한 인물이라 그의 진술의 신빙성은 별로 없다.[[https://orunkim.tistory.com/1010|#]]] [[뉴스타파]]에 따르면, 2016년 7월 15일 [[국가보훈처]]에 공문을 보내 건국훈장 심사에서 친일 의심 행적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서상일의 건국훈장 서훈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지만, 서상일은 현재까지 건국훈장 서훈자로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