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 (문단 편집) === 가열찬 [[학생운동]] === 정외학부(당시 정치학과)는 1946년 정식 설립된 직후부터 반탁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이는 해방정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학과 특성 상 유달리 정치의식이 강한 인재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기인한 것이다. 아울러, [[국대안 파동]]을 거치고 재조직된 [[서울대학교]], 그것도 [[경성대학]]의 직계 후신이었던 [[문리대학|문리과대학]]을 구성하는 학과 중 정치학과가 가장 규모가 컸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초, 문리과대학 구성 시 학과별 정원은 20명선으로 통일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대안 파동을 거치고 기존의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과에서 분리된 법학과, 경제학과, 정치학과 중 앞의 두 학과가 법학전문, 경제전문으로 흡수되면서 이들(본과생)과 예과생 중 상당수가 캠퍼스에 잔류하기 위해 정치학과로 전과를 희망하였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당시 정치학과는 문리대 중에서도 정원 80명으로 기형적으로 많은 정원을 갖고 있었다. 정치학과의 과다한 인원 문제는 50년대 초 정치학부 승격 논의를 유발하였고, 결과적으로 외교학과 독립이라는 형태로 해소되었다.] 이 당시 사회주의 계열 학생 운동에 맞서 [[채문식]]이 [[경성대학]][* 반탁운동 단체인 경성대학 동지회 운영]-[[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우파 계열 학생 운동을 이끌고 있었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이철승]], [[연희전문학교]]-[[연희대학교]]의 [[이동원]]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여 반탁 운동에 나섰다. 이외에도 [[엄영달]], [[박준규(1925)]] 등이 반탁운동의 기수로 활동하였다.[* 문리대에서는 [[천관우]](사학과), [[박용만(1924)|박용만]](철학과) 등이 정치학과 외의 대표적인 운동가였다.] 1940년대의 운동이 일종의 [[공산주의|적색 전제]]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폐허 속의 학생 운동은 [[이승만 정부]]의 문민독재가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독재|백색 전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후 정치학과 중심의 문리대 독서회인 신진회와 이를 둘러싼 1957년의 [[류근일(기자)|류근일]] 필화 사건은 뒤이을 4.19의 대표적인 전조라 할 수 있다. 전후라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권위주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띠고 출범한 학회 신진회는 무산대중의 단결, 새로운 국가 건설 등을 학회지 논문에서 과감히 주장한 류근일이 [[국가보안법]] 저촉을 이유로 구속되며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한국에 있어서의 무산계급 운동의 세력적 기반과 그 이념적 기초는 서구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잉여노동가치를 착취당하는 산업 노동자군이 뚜렷이 하나의 대계급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한국 무산운동은 그 계급적 기초를 인텔리겐차들에 의해 지도되는 근로 소시민과 농민과 노동자들의 전체 무산대중 층과 이에 협력, 합세하는 진보적 프롤레타리아 군중의 총화에 구해야 할 것이다. > >[[대한민국 제1공화국|특권적 관료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북한|전체적, 억압적 공산주의]]를 다 같이 경험한 우리의 인민대중들은 [[사회민주주의|새로운 형의 조국]]을 얼마나 갈구해 마지않는가. 끝으로 한 가지 제시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라!’는 외침인 것이다. > >[[류근일(기자)|류근일]] - 모색,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 中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702162113005#csidx9a059e16c9dc15bbd5ddb7f05424e9e|출처]] 필화 사건은 류근일의 무죄 방면으로 종식되었지만, 신진회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신진회는 [[이수정]], 윤식, [[이영일]], 김정강 등의 활동가를 길러내는 요람이 되었다. 1959년 봄 이수정, 유세희, 이장춘, 서정복, 윤식 등은 '후진국문제연구회'를 결성하여 사실상 신진회를 재건하였다.[* 후진국문제연구회는 4.19 이후 다시 신진회로 개명하였다.] 1960년의 [[4.19 혁명]]에서는 후진국문제연구회 출신 학생이 선언문 작성, 운동 기획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고 만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및 [[3.15 의거]] 익일인 3월 16일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0741|김성희]] 교수의 정당론 수업 후 모인 정치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학생 봉기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곧 문리대 타 학과를 포함한 4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 40여 명은 3학년생(58학번) 윤식(학생회장), [[이수정]], [[황선필(언론인)|황선필]], [[박실]], [[양성철]] 등 14명, 2학년생(59학번) [[김영작]] 등 5명 등 정치학과 학생들을 비롯해, 중문과, 사학과, 철학과 등 문리대 다수 학과로 구성되었다. 집행부는 타 대학과의 연계를 통해 서울 시내 대학 학생 시위일을 4월 23일로 정하였으나, 일정 공유의 혼선으로 [[고려대학교]]에서 먼저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4.18 학생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사전 예정된 거사일을 앞당겨 4.19일에 문리대를 비롯한 시내 각 대학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4.19 혁명]]이었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교시한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가 [[신탁통치 오보사건#s-4.1|적색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거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백색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 > >(중략) > >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본 제국|일제]]의 철퇴아래 미칠듯 자유를 환호한 [[한국독립운동|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 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 > > > 단기 4293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일동[* 정치학과 재학생 [[이수정]]이 작성] 4.19 혁명의 성공으로 찾아온 민주주의 정부는 뒤이은 [[5.16 군사정변]]으로 전복되고 만다. [[박정희]] 정부는 정치외교학과를 시위꾼 양성소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농민이 아들을 공부시킬 때에는 자기와 같이 손에 흙 묻히고 일하지 않고 공짜로 먹는 벼슬(법과, 정치과)을 하게 하려고 한다."(박정희, 1962)], 실제로 1960년대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정치학과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가장 주요한 반대세력 중 하나였다. 과거와 달리 1960년대 이후의 정치학과(그리고 외교학과는) 정원 30명이 채 안 되는 소규모 학과가 되었으나,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하에서도 [[6.3 항쟁]]을 주도하는 등 반권위주의 투쟁의 중심에 서있었다. 정치학과 중심의 문리대 학회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 [[김중태(1940)|김중태]], [[김도현(1943)|김도현]], [[현승일]], [[박범진]], [[이종률(정치인)|이종률]], [[김경재]]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활동가에 해당한다. 1965년 간첩 조작 사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이 보여주듯, 권위주의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 [[파일: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항소심 공판.jpg|width=100%]] || || {{{#ffffff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공판에 나온 [[김중태(1940)|김중태]] 등 민비연 구성원'''}}} ||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에서의 엘리트주의적 색채가 옅어지면서 특정 학과, 특정 대학 중심의 운동보다는 전방위적인 학생운동으로 경향이 점차 변화하였다. 그럼에도 87년 [[6월 항쟁]]에서 재야 운동가로 활동한 [[이부영]], 김정남을 비롯해 [[제정구]], [[김부겸]] 등을 배출하는 등, 학생운동계의 주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