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토박이 (문단 편집) == 서울토박이가 적은 이유 == [[1983년]]에 발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서울 한양도성|서울]]의 특수한 인구구성 및 역학 관계 때문에 서울토박이가 적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1310020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1-31&officeId=00020&pageNo=9&printNo=18869&publishType=00020|#]] [[서울 한양도성|한양]]은 애초부터 [[조선]]이 건국하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이기에 조선 건국 이전 고려시대부터 그 곳에 살던 토박이들은 [[성저십리]]나 [[양주시|양주군]]으로 쫓겨났으며, 그 대신 [[전주 이씨]] 왕족 및 지방 출신의 출세한 양반들이 올라와서 사는 곳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항 이후 외국 상인, 지방 출신 상인들에 밀려 서울토박이 상인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양반]]들은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 [[가회동]][* [[계동]], [[재동]].]에 있는 [[북촌한옥마을|북촌마을]]에, [[중인]]들은 [[청운효자동]][* 누상동.], [[사직동(종로구)|사직동]]에, 농민들은 [[서대문구]] [[신촌동(서울)|신촌동]], [[마포구]] [[도화동(마포구)|도화동]], [[성북구]] [[종암동]]에, [[상인]]들은 [[마포구]]나 [[용산구]]에, [[장의사]]들은 광희동에, 백정들은 [[혜화동]]에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서울토박이의 수모는 계속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 외곽의 토막집 지역에 살던 빈민층 토박이들이 만주 등으로 강제 이주 당하기도 하였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제의 감시 속에서 불편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해방 이후 특히 [[6.25 전쟁]] 때는 [[대구광역시|대구]]나 [[부산광역시|부산]] 등 남쪽에 있는 대도시로 피난을 가거나 인민군 등에게 강제노역과 굶주림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을 당시에는 상당수 시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오인받아 많은 수난을 겪었다.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2229459&cpage=&mbsW=search&select=sct&opt=1&keyword=%C0%CC%BD%C2%B8%B8%B0%FA%20%BA%CE%C1%A4%BC%B1%B0%C5|#]][* 참고로 본래 서울시민들은 남부 지방에 비해 보수적 성향이 짙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민군의 점령치하로 들어간 서울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잔류파'가 되어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노역에 시달리고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9.28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돌아와서 ''''부역자 엄단 방침'을 선포'''했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민들 사이에 '도강파 - 잔류파 문제'로 [[서울특별시]]는 오랫동안 갈등에 시달렸고, 세태는 험악해졌다. 때문에 서울시민들은 '''[[이승만]]과 [[자유당]]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956년 선거 때 부통령 선거, 1958년 총선 때마다 이승만과 [[이기붕]], 자유당이 유독 서울에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민들로부터 야유를 심하게 받았었다. 특히 서울시민들은 이기붕을 매우 싫어했다.] 실제로 '''전쟁 중 학살자 수를 보면 절대적 수치는 아니지만 상대적 수치로 보았을 때 서울이 가장 많았다'''. 게다가 전쟁 고아의 대다수가 서울 출신이기도 한다.[* 이 중에서는 혼혈 전쟁 고아도 상당수였다. 대부분이 [[미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며, 95%가 서울 태생이다.] 물론 그렇기에 1.4 후퇴 당시, 부역자로 안 몰리려고 거의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서울특별시|서울]]을 떠났다. 경제 성장 이후로는 서울토박이 상당수가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미국]]이나 [[캐나다]] 내 이민자의 대다수가 서울 출신인 점 때문에 [[미주 한인어]]는 예전 서울토박이 말투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역으로 [[서울특별시]]에는 전국 각 지방 이주민의 영향으로 말투와 억양이 크게 달라졌다.] 국내에 남아 있는 토박이들은 성저십리 바깥의 강남, 영등포나 경기도의 과천, 분당 등지로 분산 이주하였다. 빈민층 토박이 중 일부는 [[광주대단지사건|지금의 성남시 구도심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하거나]] [[금천구]] [[시흥동(서울)|시흥동]], [[관악구]] [[봉천동]] 등 서울 변두리로 밀려나기도 했다. [[도봉구]], [[은평구]]에도 분산 이주한 토박이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특히 [[사대문 안]]과 [[성저십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경성부 토박이의 출산율은 절망적으로 낮은 동네들이었는데, 서울 내에서도 타 지역 출신 이주민들의 출산율에 비해 1~2명 더 낮은 수치였다.[* 실제로 서울토박이들인 [[서태지]]와 [[손석희]] 둘 다 또래 기준으로 당시로써는 형제자매수가 적은 축에 속한다. 비단 이 둘 말고도 실존인물 문단에도 그 당시 기준으로 적은 축에 속한 이들이 꽤 된다.][* 더군다나 남아 있는 서울 토박이들은 대체로 [[대졸]] 이상인 고학력자들이다. 실제로 당시 대졸 이상인 부부의 출산율이 [[고졸]] 이하인 부부에 비해 낮았다.] 대표적인 서울토박이를 들자면, 마포 공덕동에서 3대째 살아온 [[노웅래]] [[마포구 갑]] [[대한민국 국회의원]], 역시 마포에서 5대째 살아온 [[박홍섭]] 前 [[마포구청장]], 대대로 서울 종로 일대에 살아온 집안 출신인 [[김태영(군인)|김태영]] 前 [[국방부장관]]들이 대표적인 인물.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선시대까지 한국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였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도 근대적 도시화가 어느정도 진행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농업 비중이 높았다가 1960년대 이후 산업화로 급격히 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촌향도]]로 인해 시골에서 대도시로 몰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도시 내 토박이의 비율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비단 서울 뿐 아니라 [[부산광역시|부산]], [[대구광역시|대구]] 등 다른 국내의 대도시들도 전부 정도의 차이는 좀씩 있지만 마찬가지로 3대 이상 토박이의 비중이 외국들에 비해서 낮은 편이다.[*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을 제외한 대도시들 중에서 토박이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대구광역시|대구]]로, 전체 인구의 '''55%'''가 3대째 이상 살고 있는 [[토박이]]가 많다. 반대로 가장 낮은 지역은 [[대전광역시|대전]]으로, '''25%''' 정도밖에 안 된다. 물론 서울과 비교하면 높은 비율이지만, 전체 토박이 인구 수로 따지면 서울은 50만 정도, 대전은 37만 정도로 서울보다도 적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서울은 최대 도시로서 전국 각 지역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많은 점 또한 영향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