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특별시/역사 (문단 편집) === [[조선]] ~ [[대한제국]] === [[파일:attachment/431801_396657003731190_1292874738_n.jpg|width=600]] 사이버조선왕조 [[http://www.1392.org/|링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개경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다 1394년(태조 3) 10월 25일(양력 [[11월 18일]])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한성으로 천도했고 이 시기에 [[정도전]]에 의해 [[경복궁]]이 건설된다. 그러나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조선)|정종]]은 형제들간의 피를 본 한성이 찜짐했는지 1399년(정종 1) 3월 7일(양력 [[4월 13일]]) 다시 [[개성시|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태종(조선)|태종]] 대인 1405년(태종 5) 10월 11일(양력 [[11월 2일]])에 다시 서울로 옮겨왔고 이후 근 6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최대도시 역할을 거침없이 수행해 왔다.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한양과 함께 수도 후보지로 꼽힌 곳이 무악(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서울)|신촌동]]), 부평, 계룡(현재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계룡대]] 일대)이었다. [[파일:수선전도.jpg]]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서로는 [[홍제천|불광천과 홍제천]], 동으로는 [[중랑천]],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는 [[북한산]]에 이르는 지역을 자세히 나타낸다. 이로써 조선 후기 한양의 영역이 어느 만큼이었는지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조선말기한성부-02.jpg]] 당시 서울의 영역은 지금에 비해 좁은 것으로, 오늘날의 '''종로구, 중구,용산구, 동대문구, 성북구, 서대문구,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남), 마포구 일부, 성동구 일부, 은평구 일부''' 일대까지 포함되지만, 보통 [[사대문안]]만을 진짜 서울로 치는데,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인근 10리 이내 지역도 서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지만 사실상 주택과 상점이 들어선 '''시가지'''인 사대문 안과 근교 농어촌 분위기라서 단순 행정구역상만 한성인 성저십리 지역은 환경상 구분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울(한양)의 범위를 표시하는 뜻으로 금표를 경계에 여러 개 설치했는데 대략 한강(용산포구)-마포-불광동-북한산-우이천-미아리-중랑천을 잇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성저십리]]''' 참조. 이 역시 산이나 강 등의 자연지물을 천연 방어시설로 활용하던 전술의 일환이였다. 한편 조선이 건국하면서 [[태조(조선)|태조]] 대에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에서 양주시 [[고읍동]]으로 이전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왕조가 남경을 새도읍으로 삼으면서 그쪽 토박이들을 한성부 성저십리나 양주군으로 쫓아냈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일대 및 송파구 잠실/신천 일대,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북) 및 은평구 진관동(당시 소속했던 신혈면이 양주에서 고양으로 넘어간 것은 1906년)과 불광동 [[독바위역]] 주변은 '''경기도 양주목''', 서초구 일부분, 강남구, 송파구(잠실/신천 일대 제외)[* 1914년에 잠실/신천 일대가 고양군 편입. 여기에 대해 부연한다면 당시의 [[한강]]은 지금의 잠실 인근에서 마치 여의도 부근처럼 중간에 섬을 두고 위/아래로 흘렀다. 위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한강이고 아래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이다. 그런데 1914년 당시에는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어서 아래쪽 경계를 강북/강남 경계로 보았고 그 결과 지금의 잠실지역(석촌호수 북쪽)이 고양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을축년 대홍수]]로 위쪽 강이 더 넓어졌고 결국 1970년대 잠실지구 개발 당시 아래쪽 강은 아예 매립해서 강(개울)으로의 역할이 소멸되고 그 흔적으로 석촌호수 정도를 볼 수 있다.], 강동구는 '''경기도 광주부''', 마포구 일부(상암동 등)와 은평구 남부의 불광천 이서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영등포구(여의도, 양화일대 제외), 구로구 동부(신도림동 등), 금천구(당시 금천/시흥현 현내면 지역으로 금천/시흥의 중심지였다.), 동작구 일부(신대방동, 대방동, 상도동), 관악구 상당부분(남현동 제외)은 '''경기도 금천현'''(후에 시흥군), 동작구 일부(노량진,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 서초구 대부분, 관악구 남현동은 '''경기도 과천현'''(후에 시흥군에 편입), 강서구 대부분과 양천구 일대, 영등포구 양화지구는 '''경기도 양천현'''(후에 김포군에 편입), 구로구 서부(고척동, 개봉동, 온수동 등)와 강서부 일부는 '''경기도 부평도호부'''(후에 부천군으로 개편)에 속했었다. 한양(서울)의 진산(鎭山)은 [[북한산]](삼각산)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인한 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대표적으로 오늘날의 중곡동 등 광진구 일부지역)가 한성부 두모방에, 고양군 하도면 일부(현재의 수색역 부근)가 한성부 연희방에 각각 편입되었고, 성내 5부(部 :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를 5서(署 : 동서, 서서, 남서, 북서, 중서)로 개편했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1896.jpg]] [[구한말]] 당시 서울 및 근교지역을 간략히 나타낸 지도. 이 지도에는 옛 [[강남구]] 포이동(현 [[서초구]] 양재2동 및 강남구 개포4동의 각 일부) 쪽에 광주군-과천군 간 경계 오류가 있다. 현 서초구 양재동-강남구 개포동 간 경계선([[논현로]])에서 그대로 유추한 듯 한데, 원래는 [[강남대로]] 선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얼추 맞는다. 한성부 청사는 지금의 KT광화문지사 건물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쳐 건물이 아예 '''소실'''되어 버렸다. [[17세기]] 실학자인 [[유형원]]이 한성부 행정구역 추가 확장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제안한 한성부 추가 편입 지역으로 지금의 영등포구, 동작구 북부, 서초구 북부, 강남구 압구정, 송파구 잠실,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구리시, 의정부시, 고양시 덕양구 일대 등이었다.[* 논문 출처: 楊普景. (1994). 서울의 공간확대와 시민의 삶. 서울학연구, (1), 48-7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