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원 (문단 편집) === 폐단 === 17세기 이후 서원이 남설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 산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니지만 자신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 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그래도 지방에선 터줏대감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이들은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지방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을 향약이나 반상의 도리를 어겼다 하여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지르고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제공 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이런 서원의 폐단은 '''선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도''' 나올 정도다. 서원이 등장한 게 중종 시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주도권을 잡는 게 선조 시대인데 그때부터 말썽이었으니... 결국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조선이 뿌리 뽑으려 했던 고려 말 사찰의 폐단을 답습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를 제사 지내기 위한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힘이 세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 이것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한다. [[이순재|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제사 지낼 돈을 내라는 청구서. 심지어 워낙 위세가 강력해서 수령들도 어쩌지 못했다.]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또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원군 역시 집권 전에 만동묘에서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