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인 (문단 편집) === 이율곡 영수 등극 및 동인과의 정치 투쟁 === 이 상황에서 젊은 신하였던 율곡 [[이이(조선)|이이]], [[성혼]]의 [[기호학파]][* 경기의 기와 호서(충청도)의 호가 합쳐져서 기호 지방이라고 한다]는 사림 운동이 꼭 원리주의화 되는 것보다는 군자들의 당여라는 기치 아래 함께 가자는 주의였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림은 이런 주장에 등을 돌렸다. 이이는 화합을 말하는 뒤에서 자신을 천거해준 노학자 백인걸을 감히 학문이 기만 세고 거칠다고 선조에게 혹평을 해, 가뜩이나 꼰대 많고 서열이 중요한 유교적 조선 사회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 율곡 이이가 갈등을 봉합하려고 하니 될 리가 없었다. 이이는 나름대로 당쟁을 평등하게 해결한다고 한 것이 사실상 다수인 동인에게는 서인만 편드는 것으로 보였던 것. 결국 이이는 1582년(선조 15년)에 서인 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붕당에 뛰어들었고, 결국 서인은 이이와 기존의 성혼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학파로서의 붕당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동인(조선)|동인]]이 절대 우세한 상황이었다[* 동인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초기 서인은 훈구파와 타협하거나 훈구파인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권에서 살아남은 기존 사림이 주축이었다. 때문에 훈구파를 몰아낸 동인에게 명분부터 밀렸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 출신이나 훈구파 가문들이 대거 많았고 서인이라는 당 자체가 대윤, 소윤, 기성사림, 온건사림, 노당 등을 모두 합당하여 생긴 당이기도 했다. 반대로 말하면 짬밥 좀 먹은 베테랑 관료는 서인이 많았다는 뜻도 된다.]. 초창기 동서 대립은 동인의 정치 개혁 요구에 반대하는 사람을 무조건 서인으로 찍어 두들겨 패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예로 명종, 선조 대의 명재상 [[박순(1523)|사암 박순]]은 정승 자리를 14년이나 버텼건만 이율곡을 변호했다가 찍혀서 사직서를 내야할 정도였다. 애제자 [[정개청]]과 제자들이 모두 등돌리는 치욕도 겪어야 했다. 다만 율곡 이이가 별세하기 전에는 서인이 정권을 잡고 동인이 약간 우세한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율곡 이이가 별세를 하면서 정권도 동인에게 대거 넘어간다. 1584년부터 1589년까지 정권은 동인 독차지였으나 [[기축옥사]]로 인해 반전되었다.[* 기축옥사는 서인의 조작이라는 설이 있으며, 옥사가 확대된 것은 선조의 의도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사화 이상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정여립의 고향인 [[전주시]]를 중심으로 [[전라도]] 지방 출신 선비들이 줄줄이 형장으로 끌려갔다. 서인 천하가 열리는 찰나 정철이 선조의 후계자 문제(건저 문제)로 실각하고 다시 정권을 잃었다. 그래도 정권만 내놨지 서인은 다들 목이 붙어있었다. 정치적 결사체로서 힘도 여전했던 걸 보여주는 것이 1590년 일본 통신사 정사 황윤길이다. 선조가 서인, 동인 셋트로 일본에 보낸 걸 보면 서인은 결코 몰락하진 않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