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서일 (문단 편집) == 생애 == 1881년 2월 26일 함경도 경원도호부 의동면 삼리김희동(現 함경북도 경원군 유다섬리)에서 아버지 서재운(徐在云, 1860. 1. 15 ~ ?)과 어머니 [[변(성씨)|경주 변씨]](慶州 邊氏, 1860 ~ ?. 9. 24)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채병권(蔡秉權)의 딸 [[평강 채씨]](1875. 1. 10 ~ ?)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서윤제]](徐允濟)와 딸 서죽청(徐竹靑, 1904. 1. 19 ~ ?) 등 1남 2녀를 두었다. 일찍이 [[경성군]]에서 함일학교(咸一學校) 사범속성과를 졸업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해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1년 3월 [[길림성]] [[왕청현|왕청설치국]](汪淸設治局)[*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왕청설치국은 1912년 왕청현으로 승격되었다.]에서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해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12년에는 왕청현에 청일학교(靑一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대한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그해 5월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한 뒤 8월에는 그 산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설치해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그해 10월에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칭했다가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협의하에 대한군정부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칭해 총재에 취임했다. 대외적으로는 [[서로군정서]]와 구분해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을 주로 썼고, 이후 [[이범석]]·[[김좌진]] 등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여러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무장투쟁 조직에 '서일'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무조건 그가 총재일 정도로 그 위상은 대단했다. 또한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인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총판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었을 때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후 만주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대한독립군단을 이끌고 [[소련]]으로 근거지를 옮기려 했으나, [[자유시 참변]]에 휘말려 청년 사병들이 다수 희생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1년 9월 28일 길림성 밀산현(密山縣) 쾌상봉(快上峯) 벽리 산골짜기의 소나무숲에서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폐기법(閉氣法)으로 자결하여 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그해 10월 9일 수습되어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화룡시|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坡湖)[*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진(龍城鎭) 청호촌(淸湖村).]에 안장되었다.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능력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뛰어나 대종교 교리도 정리하여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회삼경(會三經)" 등의 저술을 남겼고 대종교 3대 교주로 유력하였으나 '''교단을 지키는 것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며 투쟁 노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https://m.cafe.daum.net/tjdlfchdwo/HQ66/99|봉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