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정주 (문단 편집) == 여담 == * 서정주는 [[시인(문학)|시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개인사에 있어서는 [[정치]]적으로 잘못된 행적을 여러 번 보여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러한 씻을 수 없는 오점만 남기지 않았어도 충분히 추앙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을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서정주가 [[능력]]이나 실력은 출중하지만 결코 시대를 관통하여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인물로 보면 된다.] 우선 [[일제강점기]] 때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친일 활동을 하는 오점을 남겼다. 현재까지 총 10여 편의 [[친일]]적 성격의 글들이 발견되었으며, 때문에 [[광복]]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소환되었다. 이때 "적어도 [[일본 제국|일제]] 치하에 몇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우리 [[민족]] 절대 다수의 실상이었다고 회고한다"는 발언을 남겼다.[* 이 부분이 영화 「[[암살(2015)|암살]]」에 나오는 대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변명과 다를 바 없는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정치 상황에 대한 오판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후회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는 저명한 한인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이름을 본인의 동의 없이 차용하거나 도용하여 자신들의 선전에 이용하던 시절이었다'며 서정주 역시 도용의 피해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호가 민망할 정도로 그가 적극적으로 일제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는 증거들은 차고 넘치며, 심지어 본인조차 친일행위를 인정했다.[* 사실 증거가 너무 명확해서 '차마 부정하지 못 한 것'이지, 절대 친일행위를 반성하거나 사과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생동안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회피하거나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해방 이후에는 독재자들을 찬양하는 등 일생동안 일관되게 권력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 * 1949년 여름부터 경무대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구술로 [[이승만]]의 자서전인 「우남 이승만전」을 완성하였으나, 이승만의 선친 이름에 경칭을 붙이지 않았다 하여 모두 파쇄된 [[해프닝]]이 있었다. 이 책은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보강하여 80~90년대에 재출간 되어서 세상에 드러날 수 있게 되었다. *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충격적일 정도로 친[[군부]]적 색채를 확연히 드러냈는데 1987년에는 전두환의 만 56세 [[생일]]을 기념하는 축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으며 전두환 또한 서정주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3~4공화국 당시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했던 인사들이 5공 정권에는 친군부를 넘어서 [[아부]]에 가까운 [[병크]]를 벌이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혁신계 혐의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그해 5월」 등의 [[소설]]이나 여러 [[에세이]] 등을 통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서 혐오를 보였던 소설가 [[이병주]]는 <대통령들의 초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전두환을 찬양하였다.] 1987년 [[4.13 호헌조치]] 때는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발언을 남겼는데 [[카더라]]도 아니고 4.13 호헌조치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반응이라고 해서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서정주는 [[학생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내어 [[운동권]]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 그는 [[문학]] 작품을 쓸 때 현재도 따라갈 이가 없는 수준의 단어 구사와 소재 선택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이 되는 시기 이외의 작품에서는 순수 문학적 색채를 지향했으며 소재로 [[전통]]적 요소들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에 수록된 시들은 몸부림치는 [[생명]]력을 시적인 표현으로 적절하게 소화해내었다는 평을 듣는다. [[이문열]]의 봉인됐다가 풀린 소설 「[[사로잡힌 악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정도 가감만 하면 서정주의 시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능력이 있다. 위에서 인용된 시들 외에 당장 널리 애송되는 유명한 구절들만 언급하더라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배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화사#s-2.1]]」) >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 > >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무등을 보며」) > >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추천사]]」) > >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꽃밭의 독백」) > >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이런 서정주의 [[언어]] 감각을 두고 평론가 김우창은 "그의 시적 언어는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라고 평하고 있고 평론가 유종호는 "어떤 말이나 붙잡아 늘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을 뛰어난 부족 방언의 [[요술사]]라고 부르는데 유보감을 드러내는 이 또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이렇듯 순수하게 문학적 업적만 보면 [[한국]] 현대시의 거목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지만, 문학인으로서의 의무를 회피하고 일신의 안위만 노린 기회주의자라는 비판 또한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즉, [[소인배|자기 그릇]]에 걸맞지 않게 과분한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인지 그의 사망 이후로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많이 빠졌다고 하며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던 서정주의 집은 폐가로 방치되었다가 2011년 복원되어 개방했다. 아마 친일 행위만 하지 않았더라면 [[모의고사]]나 [[수능]]에 [[윤동주]]나 [[이육사]]급 이상으로 많이 출제되었을 것이다. 당장 친일 행위 관련 비판이 많음에도 모의고사에 [[얼굴]]을 비치고 있으니 말이다. 달리 말하면 본인의 악행과 뻔뻔함 때문에 그 능력이 묻혔으니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 한국 문단에서 서정주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여론은 알게 모르게 묻힌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서정주 본인이 살아 있었을 때야 좋든 싫든 문단에서 그가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있었을 때니 대놓고 비판하기는 좀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나 사후에나 그의 잘못된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은 결코 적지 않았고 심지어 서정주를 옹호하는 이들의 경우에도 그가 잘못된 행적을 남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거의 평생에 걸쳐 잘못을 저지른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서야 되겠느냐'는 주장과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오점 때문에 그의 문학 전체가 매도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한편 대중이나 젊은 학생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학계에서 진지하게 평가되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업적은 차이가 꽤 크다. 서정주와 대비되어 높게 평가받는 [[윤동주]]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좋은 면이 많아서 그렇지, 문학적 성취에서는 서정주나 [[백석(시인)|백석]]보다 분명히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다. * 멸칭으로 '말당(末堂)'이 있다. 이것이 전두환(혹은 당시 영부인 [[이순자]])이 서정주를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 서정주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의 호인 '미당(未堂)'을 잘못 읽어 '말당'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사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당시에 유행하던 [[블랙코미디]]인 '[[전두환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로 '토관과 신토'[* 유명한 고전 [[영화]]인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에서 '사'가 둘 다 '士(선비 사)'로 쓰는데 이를 비슷한 모양인 '土(흙 토)'로 읽은 말장난.]가 있다. 이외에도 [[김수정(만화가)|김수정]]의 만화 「[[O달자의 봄]]」에서도 이 '말당' 얘기가 나오지만 이건 그냥 호의 '미(未)'와 '말(末)'의 모양을 이용한 말장난 [[개그]]. * 그의 시「[[자화상(서정주)|자화상]]」(1937)에 나오는 '애비는 종이었다'는 구절을 가지고 '종놈의 자식'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다. 이 시에서도 나오듯이 서정주 집안은 [[김성수(1891)|김성수]] 집안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된 것이 서정주의 아버지가 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이다. 마름은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으로 소작농들 앞에서는 지주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렸다. 「[[동백꽃]]」의 점순이도 바로 이 마름 집안 딸이다. 이건 그의 친일 행각과는 무관한 [[인신공격]]성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력이 워낙 악질적인지라 '말당'과 함께 서정주를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종놈 새끼라는 식으로 자주 언급된다. * 일단 문학적인 성취는 높은 사람인지라 생전에 수많은 [[제자]]들을 기르긴 했지만,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의 친일 행위와 친군부 행위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되려 더 크게 비판하고 반감을 가지는 이가 많다. 서정주의 제자인 소설가 [[조정래(소설가)|조정래]]는 그의 친일 행위와 친군부 행위를 "수십 년 동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사실 조정래는 서정주 생전 이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1985년 당시 조정래는 「한국문학」이라는 문학지를 맡았는데 광복 40주년을 맞아 8월호에 '친일문인'을 다루는 특집 기사를 기획하고 친일 전력이 있는 문인 가운데 생존자들을 찾아 그들의 행적을 스스로 지면을 빌려 이야기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조정래에게 서정주는 은사인 동시에 아내(이자 동창) 김초혜 시인과 하는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준 사람이었으니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당연하다. 아내와 길게 상담하고 고민한 끝에 서정주를 찾아간 조정래는 서정주에게 "글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께서는 자유로워지십니다."라고 말하였으며 이 말을 들은 서정주는 조정래에게 "네가 내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화를 냈다 한다. 조정래의 회고에 따르면 그냥 쫓아내지는 않고 조정래 앞에서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장광설을 두 시간 동안 펼쳤다고 한다. 죽기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나와 [[기자]]에게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질문을 받자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라고 말하고 끝내 버렸다. 이를 집에서 화면으로 보던 조정래는 차라리 이 때 한 마디라도 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 문인 [[조지훈]] 역시 그에게 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매해 정월 [[후배]] 문인들이 항상 사실상 대[[선배]]인 서정주를 제쳐두고 제일 먼저 조지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이유는 조지훈은 학생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4.19 혁명|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시위대를 학생과 함께 이끈 지조 있는 문인]]이었기 때문. 역시 동갑내기 문인 [[황순원]]도 그에게 크나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황순원은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어떠한 비판이나 칭송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고[* 심지어 [[황순원]]은 아들인 황동규가 태어날 무렵 일제의 탄압이 더 극심해지자 아예 대놓고 절필했다.] 이에 문인들은 "역시 선생님다우십니다"라고 극찬하며 인사드리러 갔다. 당연히 후배 문인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이자 서정주는 이에 굉장히 열등감을 느꼈다.그러한 까닭에 서정주 본인은 '순원을 보면 옛 고즈넉한 우리 선조들이 떠오른다'며, 황순원 칠갑잔치 때 축시를 쓴 적있다.[* 황순원의 그 모습을 본인 스스로는 꽤 동경했던 모양.] * [[신경림]] 시인의 수필집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67년 겨울 서정주의 동서인 [[김관식]] 시인이 신경림 시인과 함께 조지훈 시인의 집에 새해 문안 드리고 술자리를 가졌다. 그 다음에 서정주 시인에게 세배 드리러 갔는데 이 때 김관식은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그만 신발을 벗고 [[택시]]를 타 버려서 눈길을 양말 바람으로 걸어와야 했다. 서정주는 그 모습을 보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훈계하였다. 그러자 김관식은 술김에 화가 난 나머지 "이전의 행적을 볼 때 형님을 먼저 뵙는 것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조지훈 선생 댁에 먼저 세배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이에 서정주는 몹시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그 자리에서 [[막걸리]] 주전자가 김관식의 [[머리]]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 때 함께 찾아온 신경림 시인에게도 불벼락이 떨어졌는데 "이런 미친 놈과 어울리면 자네도 미친 놈이 될 테니 함께 다니지 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에 서정주의 아우인 우하 서정태가 김관식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전한다. 김관식은 서정주에게 '사위 같은 동서'였다. 서정주의 처제는 언니(서정주의 아내)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서정주가 처제를 딸처럼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 김관식은 스무 살에 낸 첫 시집에서 조지훈의 추천사를 받았는데 결혼 전에 낸 2번째 시집에서는 서정주의 추천사를 받았으니 서정주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서운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는 김관식을 매우 아껴서, 그가 몸에 아플 때에는 [[닭고기]]와 [[과일]]을 마련하고는 몸소 병문안 가서 몸보신을 시켜줬다고 한다.[* 김관식은 평소 술을 매우 즐기고 굽힘없이 호방한 성격이였다. 문학상 시상식에서 "너희끼리 상 나눠 먹느냐"며 호통을 치고 미흡한 서민 복지 [[정책]]에도 항거해 벗은 몸으로 소를 거꾸로 타고 세검정에서 당시 중앙청으로 나간 일이나 살던 동네 판잣집 철거 때는 지붕에 앉아 술판을 벌인 일화 등으로 유명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출마하여 [[장면]]과 겨루었으나 낙마한 뒤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다 [[간염]]에 걸려 1970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해양경찰가와 [[롯데칠성음료]] 사가, [[재능교육]] [[사가(기업)|사가]][*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40vm&fldid=1hhE&datanum=50&openArticle=true&docid=40vm1hhE5020090219025802|참고 자료.]]]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 2020년 3월 11일 미당 서정주 시인의 8살 아래 남동생인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이 97세에 별세했다. 동생으로 서정주와 사이가 각별했고 형을 따라 시인을 꿈꿨으며 서정주는 19살에 당시 15살인 여동생과 11살인 남동생의 시를 묶어 「형제시첩>이라는 제목으로 문집을 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727694|미당 서정주 동생 서정태 시인, 97세로 별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