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정주 (문단 편집) === 친일 행적 === > 나는 여기 인제 내 생애에서 가장 창피한 이야기들을 한바탕 벌여놓아야 할 마련이 되었다. 그것의 제목은 친일적 업적 또는 전범 여부에 대한 것이다. (…) 정치 세계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내 그릇된 인식을 만들고, 이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언행들이 내 생애의 가장 창피한 일들을 빚었다. (…) 여기 깊이 사과해 둔다. >---- > 서정주, 문학적 자서전 『천지유정』 중에서 서정주는 1942년 7월 13일~1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 1943년 9월 1일~10일자에 '인보정신', 1944년 12월 9일 "松井(마쓰이) [[일본군/계급|오장]] 송가", 1943년 국민문학 10월 호에 일문 '항공일', 1943년 조광 10월호에 '스무살된 벗에게'라는 수필, 11월호에 '최체부의 군속지망'이라는 소설, 12월호에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친일 행위를 하였다. 이후 말년인 1992년 [[신동아]] 4월호에 '일정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그 동안 내가 써온 시나 그 밖의 글 중에서 일정 말기에 쓴 몇 개의 글이 '친일파'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1980년대의 한동안 우리 문단의 일각에서 새삼스럽게 문젯거리가 되더니 요즘에 와서 또 웬일인지 다시 이 나라의 신문들이 이걸 내걸고 공격을 하고 있다"라고 분개하며, 자신이 친일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친일 문학을 한 것처럼 호도하였다. 거기다 자신이 쓴 친일시를 정 연구하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 알아서 찾으라고 적고 있다. 그후 다시 일본의 지배가 몇백 년은 더 갈 것 같아 체념하며 친일 시를 썼다며 상황론으로 자신의 친일을 해명한다. 1992년 「시와 시학」 봄호에서 평론가 김재홍씨와 대담을 통해 "쓰라는 대로 쓸 수 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30년대 이후 숨 쉬는 것 말고는 전부 일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서 독립운동을 하건 하지 않건 국내에선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이때 국내 독립운동은 '일제의 허락' 아래 진행되는 실력 양성/교육 사업을 제외하면 고사했고 지배 체제가 더욱 탄탄해지면서, 독립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인식이 널리 퍼졌다. 독립운동가들도 "이제 독립은 어려우니 일본의 지배는 인정하되 대신 그 테두리 안에서 조선 민족의 권익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노선으로 변화를 주었고 [[조선인 일본군]] 중에 비교적 후세대에 속한 이응준이나 채병덕은 이런 인식 아래 언젠가 일본의 협력 아래 조선이 독립하려면 일본 내에서 조선인의 위상을 올려야 한다는 의외로 민족적인 목적으로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다. 일본의 패망과 조선 독립이 연결된다는 가능성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야 처음 공식적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도 사업가나 유학생 같이 국제 정세 흐름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들 혹은 외부에 끈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문인은 가방끈만 길뿐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김동인]] 같은 블랙 코메디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 > >아아 [[레이테 만 해전|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멫천 길의 바다런가. >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멫만 리런가……. >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 x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 x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현대 [[대한민국 국군]]으로 치면 [[하사]]에 해당하는 계급. 오장은 구 [[일본군 육군]]에서만 쓰이던 계급임을 감안하면 밑에 언급될 육항대 소속이라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 [[일본군 해군]]에서는 삼등병조가 오장과 비슷한 위치였다.]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시|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신풍(神風,[[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정국대원(靖國隊員).[* 정국대(靖國隊)는 비행부대명으로, 여기서 "정국(靖國)"은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의 "야스쿠니(靖國)"를 말한다. 기존에는 "귀국대원(歸國隊員)" 또는 "구국대원(救國隊員)"으로 오독되어 왔는데, 2009년에 발간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와 사료집,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처음으로 바로잡혔다.] > >정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 x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내리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귀축영미|원수 영미국]]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 x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 x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천 길의 바다런가. >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친일시 중 가장 잘 알려진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 시의 마쓰이 오장, 인재웅(印在雄)은 실존인물로 서정주 외에 노천명도 마쓰이 오장을 기리는 친일시를 내기도 했다.[* 시의 주인공 인재웅은 이후 '''생존'''하여 해방 후 귀국했다고 잘못 알려져 [[http://www.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575791&CMPT_CD=MSEW17|왔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해방 후에도 인재웅을 본 사람은 전혀 없었다. 1946년 1월 12일 『자유신문』의 기사를 통해 미국포로가 되어 하와이 수용소에 들어갔다 생환한 2,500명이 인천항에 상륙하였으나, 명부를 조사한 결과 인재웅의 생존은 허보임이 판명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인재웅의 양친은 "찬바람이 살을 여위듯 하는 부두에 온종일 서 있으며 아들을 만나려다 그것이 허사인줄 알게되자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란 딱딱한 소재를 운문으로 세련되게 묘사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유려하게 시상을 전개해 후반부에 단번에 감정을 폭발시킨다. 문체만 보면 웬만한 서정시 저리가라다. 수미상관의 구조로 자아내는 여운은 덤. 친일시인데도 그 와중에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레이테 만 해전]]은 [[가미카제]]가 첫 등장한 전투이다. 일본 해군은 이 레이테 만 해전의 사마르 해전에서 미군의 호위 항공모함과 구축함으로만 이뤄진 작은 함대의 용맹한 분투에 쫓겨 도망쳐야 했다. 위의 친일시에서 그렇게 찬양해대던 가미카제로 깨부쉈다는 항공모함도 위에 일본 함대를 내쫓은 호위 항공모함 한 척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