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지 (문단 편집) === K-POP의 뿌리가 되다 === >'''서태지는 세대의식을 이끈 혁명적 존재''' >----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역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119345|#]]] >---- >[[임백천]] >''''케이팝의 그 무언가'가 아닌 '케이팝의 모든 것'''' >---- >[[https://brunch.co.kr/@sunuphwang/193|빌보드매거진코리아 2호]] 지금 발매중인 [[K-POP]] 음악 중 상당수의 모태가 '''서태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2023년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서태지가 닦아놓은 형식을 깰 수 있을 만한 새로운 형식이나 제도, 음악적인 시도가 [[한류]]열풍을 통해 국제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성과는 다른 이야기로 이 포맷을 대체할 포맷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음악성이 더 높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서태지라는 가수의 음악성은 평론가들과 대중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유의할 점은 현 시점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기획사에서 아이돌을 만들어 내는(육성시키는) '아이돌 산업'은 HOT나 젝스키스 등을 만든 기획사들이 맞다. 다만 그들이 모방 혹은 참고한 모범답안이 서태지와 아이들인 것. 차이라면 기업형 아이돌 시스템 특성상 개인 기획사나 다름없던 서태지와 아이들에 비해선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많이 줄었다. 그나마 HOT가 좀 시도한 편. 그래도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면 이때만큼의 비판은 안해도 될만큼 사회가 이전보단 진보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후술된 바와 같이 아티스트 서태지의 삶은 기존 음악계와 방송계, 심지어 정치권과 언론계 등 사회 기득권에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불합리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주장하고 타파하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었으며, 덕분에 3집 이후부턴 본격적인 안티도 얻었지만 그 결과물은 심의 제도 개혁 등 오늘날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보다 나은 음악적 환경을 물려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서태지 혼자만 그런건 아니었지만(예를 들어 박진영도 당시 보수적인 방송가 분위기를 깨기 위해 노력한 사람 중 한명이었다. 전설의 비닐 바지 사건도 일종의 저항 의식에서 발현된 것.), 당대 가장 영향력이 큰 아티스트였던만큼 사회적 주목도나 호소력도 가장 높았다.] 본인은 그저 랩 뮤직을 비롯해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고 비교적 겸허하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데뷔 첫해 대상을 받고 소감이라고 했던 말이 '''그냥 랩 음악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요.'''] 후술되어있듯 1집 이후부턴 스스로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의식적으로 여러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자신이 판단했을 때 아닌건 아님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등 서태지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최고의 성공을 거머쥐고자 했다. 80년대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가수왕 먹거나 90년대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 등 [[발라드/한국|발라드]] 전성기가 무르익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나방처럼 오버그라운드에 뛰어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판은 10대가 강력히 지지하는 댄스, 랩, 힙합 음악이 점령하게 된다.[* 트로트는 주류 음악에서 밀려나게 되지만, 발라드는 이런 음악들과 함께 주류로 공존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들이 순위 프로에 나왔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무렵인 1996년도에 이르러서는 온갖 기획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티브로 삼은 청소년 가수들을 양산해내면서 X세대[*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10대~20대 초반 청소년.]를 기수로 삼은 젊은 세대가 가요계의 주 소비층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이를 참고해 기획사에서 훈련한 그룹형 아이돌(젝스키스, god, H.O.T. 등)을 통칭 1세대 아이돌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한다.[* 애초에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인 [[양현석]]이 이때 번 돈으로 은퇴 이후 YG 엔터를 세우고 사업가로 변신하면서, 빅뱅 등 2세대 아이돌부턴 본인이 주도적으로 대형 아이돌 그룹을 키우기 시작한다. 양현석이 서태지를 모델로 GD를 교육한건 널리 알려진 사실. 댄스야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본인 전문 분야였고.]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가수들은 있었으나, 서태지급의 팬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 댄스 뮤직의 태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소방차, 김완선, 박남정과 같은 서태지 출현 이전의 댄스가수들 역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당대 가요계 원탑이나 업계 최고라고 부를수는 없었다. 기록으로 봐도 히트곡들은 많았으나 앨범판매량이 100만장에 못미치며 가요대상 수상기록도 전무하여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에는 확실히 못미쳤다는 것이 정론이다. 엄연히 이들의 전성기 당시 가요계에선 여전히 가왕 조용필, 공식적인 가요계 최초의 밀리언셀러 변진섭 등이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당장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댄스 가수들 출현 빈도는 차원이 다를 정도이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단지 대중음악에 그치지 않고 당시 대중문화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10대~20대가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이게 지속된건 IMF 탓도 있다. IMF 외환위기로 돈 안되는 장르엔 투자가 줄어들면서(이때 피 본 대표적인 분야가 악기 등 돈 많이 드는 밴드 분야였다. 참고로 이때 큰 타격을 입은 밴드 분야, 즉, 록 씬은 이후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 때문에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너도나도 돈 되는 팬덤을 노린 아이돌 장르만 따라하기 시작한 것. 사실 이는 정도 차이일 뿐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그 모든 게 서태지 한 명의 존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따져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어난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해야겠지만 서태지는 분명 그 흐름을 중심에서 주도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 흐름들은 많은 부분이 서태지로부터 파급, 파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존재, 더 나아가서는 시대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한 거대한 임팩트와 영향력을 남겼다.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K-POP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서태지 역시 K-POP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반드시 거론된다. 해외에서는 그를 '''K-POP의 아버지''' 혹은 '''현대 K-POP의 시조'''로 보기도 한다.[* 가수, 싱어송라이터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초라는게 정설이고, 기획자까지 포함하면 SM을 설립한 [[이수만]]도 함께 거론되는 편이다. 물론 이렇게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인데다 지금도 YG 엔터로 K팝 산업에 영향력이 있는 [[양현석]]도 일정부분 거론될 여지는 있겠다. 한편으론 K-발라드의 시조격인 [[유재하]]에서 내려오는 [[김형석]]-[[박진영]]-[[방시혁]] 라인도 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흥미롭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