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지 (문단 편집) === 방송사-기획사-아티스트 관계 재정립 === 기획사-소속가수 간의 노예계약 문제를 행동으로 격파해낸 첫 스타이기도 하다. 사실 서태지가 단지 그 시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가수의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며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 음악이나 인기 이상으로 파격적인 행보에 있었다. 1집 활동의 거대한 수입 대다수가 기획사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서태지는 이러한 불공평 계약을 깨뜨린 후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설립하고 매니저를 기용해 활동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 일이었지만[* 사실 지난 일이니까 리스크가 있었다는 정도로 말할수 있는거지 당시 상황을 돌이켜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의 광기에 가까운 배짱과 반골기질이다.][* 지금도 잊을만하면 기획사-연습생 or 가수 간 노예 계약 문제, 갑을관계로 인한 부당한 사건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니 90년대는 말할 것도 없다. ] 서태지에게는 1집 활동에서 얻은 엄청난 인기와 음악적인 작업은 물론 안무와 컨셉까지도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모험이었지만 보기좋게 대히트를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물론 판매량으로 보면 동시대의 김건모, 신승훈만 해도 서태지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경우도 있었지만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똑같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해도 자신들이 작사 작곡 안무 짜고 기획사 사장까지 다 해먹는 서태지(와 아이들) 쪽이 훨씬 많이 벌 수밖에 없었다. 데뷔한 지 1년 된 젊은 가수가 거대한 자본의 벽이나 업계의 관행을 자신의 음악과 인기만으로 모두 타파하고 거대한 성공을 거머쥔 셈이고 당시 서태지 이전의 아티스트들이나 비슷한 시기의 가수들이 여전히 소속사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상황이었기에[* 가왕이라고 불렸던 [[조용필]]마저도 1집에서 12집까지 소속사에게 다 떼먹혀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면서도 수입이 없었다고 한다.]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는 이후 가수들이 자신의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하는 등, 소위 '딴따라'로 낙인찍혀있었던 연예인의 입지를 상승시키는 촉발제로 작용하였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6&aid=0000055715|#]] 사실상 가수가 공연이나 밤무대가 아닌 온전히 음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게 된 계기가 서태지였던 셈이다. 이런 일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같은 운동권 계열, 민중가요 가수들조차 손을 못 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서태지를 혁명가라고 부르는 것. 문화 평론가 강헌은 당시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유착관계였던 음반제작사, 방송사, 언론 모두에 밉보이게 되는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초로부터 2011년 이혼소송 때까지 진행형이었던 언론매체의 '서태지 죽이기'에 대해 강헌과 진중권은 한 팟캐스트 방송[[http://www.podbbang.com/ch/7450|#]]에서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록은 이어지는 링크를 참조하자.[[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eotaiji&no=312878&page=1&exception_mode=recommend&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C%A7%84%EC%A4%91%EA%B6%8C|#]]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eotaiji&no=312886|#]][[https://m.fmkorea.com/best/6053401798|#]] 또한, 서태지의 문화적 파급력은 10대 청소년이 향유하는 문화에서도 음악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대중가요의 중심이 된 아이돌 그룹 [[H.O.T.]]는 그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음악적 역량과 개별 멤버의 예술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았고, 나름의 작곡 활동 등으로 어필하였지만,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교를 당하며 해체 이후 꽤 긴 시간동안 개별 멤버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강타]]가 당시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당시 대중들에게는 '''가수라면 자기 노래는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상당히 깊게 박혀있었고 특히 서태지 이후 등장한 아이돌들이 사회비판 요소를 넣은 곡을 발표하면 회사에서 만들어준 노래 부르면서 무슨 사회비판이냐고 안좋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한 마디로, 당시 대한민국의 문화계에서는 서태지를 "질투"하거나 "존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이들 시절 뿐만 아니라 솔로로 전향해서도 방송사에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전녹화'''". 당시 음악방송은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는데, 음향 시스템이 음악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태지는 방송사 측에 생방송 무대 대신 별도의 스테이지를 만들어 녹화하는 방식을 요구한다. 당시 가요계에서는 "서태지만을 위한 '''특혜'''"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대표적인 예가 김광수 하에 있던 조성모가 서태지의 사전녹화를 특혜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었다. 때문에 서태지 팬들이 사전녹화 무대를 기다리며 목이 말라도 당시 그가 선전하던 매실 음료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으며 지금도 음악방송을 나올 때 사전녹화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https://m.dailian.co.kr/news/view/1096961/|#]]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난과 방송사와의 대립각을 야기한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이야 무모한 행동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언론의 서태지 죽이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고 본인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인 일이라 보통 광기와 멘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재 여러 음악 프로그램에서 사전녹화는 높은 퀄리티의 무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포맷이 되었고 결국 관행으로 자리잡아 후배 아티스트들이 생방송의 부담감을 이겨내고 수준 높은 무대를 보이는 기회가 됐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선구자적인 셈. 2022년 들어서 [[이승기 후크엔터테인먼트 계약 논란]], [[이달의 소녀 츄 퇴출 사건]], [[스파이어엔터테인먼트 OMEGA X 멤버 폭행 사건]] 등으로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갑질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80, 90년대에나 발생할 법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서태지가 기획사에게 아티스트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사실이 얼마나 파격적인 일이었는지가 다시 한번 조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서태지가 기획사의 횡포를 행동으로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그만큼의 부와 인기, 역량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거기에 왠만한 사람들은 두손 두발 다 들을 엄청난 반골기질까지 포함이다.] 수십년 가까이 공고하게 축적된 기획사-방송사-언론사 유착관계가 이 아티스트 한 명으로 바뀐 것이 아님이 드러나 씁쓸함을 남긴다.[* 기획사가 아이돌의 A부터 Z까지 육성하는, 이른바 육성형 아이돌이 보편화되면서 사실상 사회초년생인 아이돌은 데뷔 전부터 투자라는 명목으로 빚이 생긴다. 그래서 기획사가 갑질을 할 때 서태지처럼 정면돌파를 하는게 더 어려워졌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내어 나온다고 한들 업계간 커넥션이 강한 바닥에서 살아남는 것도 일이다. 게다가 [[버닝썬 게이트]] 같은 사건 등으로 미루어보면 공직 사회 유착까지 심해져 어떤 의미로는 90년대보다 더 복잡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