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후 (문단 편집) === [[이화원]] 문제 === '''서태후가 가장 욕 먹는 이유.''' [[북양함대]]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떠돌았지만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러시아를 막기 위해 북양함대의 예산 일부를 육군이나 광둥 해군 예산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하지만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 냥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수치로[* 1874년 기준으로 청나라 예산은 1억 냥이었는데 [[은]] 4,000[[톤]]에 해당한다. 2022년 8월 은 시세가 그렘당 844원 정도하므로 약 3조 3억원이 넘는다. 청일전쟁 이후 청이 일본에 지불한 배상금이 2억 냥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받아낸 [[랴오둥 반도]]를 서양 열강들의 반발([[삼국간섭]])로 중국에 다시 돌려주는 대가가 딱 3,000만 냥이었다.] 이 막대한 돈이 정원 건설에 낭비된 점은 분명하다.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건대 외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방에 힘을 써야 했다. 마땅히 정원 따위에 쓸 돈이 있었으면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단이었다.[* [[한무제]]만 해도 흉노, 고조선, 남월과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대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재정을 파탄내는 원인 제공을 했다.]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직접적인 원인은 총체적인 청군의 난맥과 지휘관들의 무능 때문이었지만, 이 돈이 헛되이 낭비된 것도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중일 양국의 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바이다. 특히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서구 열강도 갖지 못한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청의 북양함대는[* 당시 청나라가 독일 조선소에 발주한 [[정원급 전함]]은 독일 해군도 발주 못한 최신예함이었다. 괜히 대륙의 기상이 아니다.] 수병의 숙련도만 어느 정도 받쳐주면 일본의 함대 따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은 정작 훈련할 포탄과 연료 부족으로 수병들의 훈련 상태가 바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일본 장교가 청나라 함대를 방문했을 때 두 가지 놀란 게 있는데 하나는 배와 포가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 사이로 널린 빨랫감들이 보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 당시 전함에서는 포 사이에 빨랫감을 너는 것을 금지했다.] 전함은 전장에서 쓰는 가장 거대한 기계이고 자동화가 되기 전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모든 함선은 수병의 숙련도가 절대적이었다. 특히 포술의 발달로 포의 사거리가 점점 길어지던 시기였기에 이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 함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전시 준비는 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이런 군대의 무능은 거국적인 시야와 통찰력 없이 권모술수만으로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시켜 온 서태후의 책임이 매우 크다. 다시 말해 평균도 못해 먹었다는 거다. 특히 동북아에서 [[청일전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서태후가 저지른 횡령은 당시 시대상황상 국방비와 근대화에 집중 투자해도 모자랄 귀중한 백성의 피땀을 이런 식으로 마구 낭비해버리는 건 어떻게 봐도 변호할 수가 없다. 당연히 '''청일전쟁을 국치 중의 국치로 생각하는 현대 중국에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안 좋다 못해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중국 [[중국 중앙 텔레비전|CCTV]]에서 2003년에 방영한 근현대사 TV 드라마인 <주향공화>(走向共和)에서는 이 부분을 묘사하면서 서태후를 신랄히 디스했을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