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후 (문단 편집) === 총평 === 서양에서 이미지가 굉장히 나쁜 듯하다. [[의화단 사건]]에서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데다 죽을 때까지 통상 개화에 소극적이었고 동양식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보여준 인물이니 아무래도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특히 [[선통제]]의 영어교사를 맡고 나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은 자신의 책에서 '''이 사람이 청나라 황실을 말아먹은 사람'''이라고 맹렬하게 깠다. 또한 서태후가 [[달라이 라마]]와 만났는데 이에 중국 민중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둘이 만났으니 하나는 곧 죽을 것이라 했는데, 서태후가 곧 죽었다며 깠다.[* 존스턴은 입헌군주국가인 영국 출신으로 변법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법운동의 원수인 서태후와 위안스카이를 열심히 깔 수 밖에. 물론 이 인간은 청나라를 멸망시킨 쑨원도 미워했다.]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서태후가 문제가 많은 인물인 건 사실이고, 서태후 생전에도 [[아편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가 불안불안했지만, 썩은 기둥이나마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듯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완전히 분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태후의 막장 행보는 오히려 청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결과를 낳았다.] 또한 양무운동과 동치중흥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서태후 덕분이다. 서태후는 인권(특히 여성인권)과 교육, [[전족]] 등 악습을 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서양 문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황실의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서태후가 시작하면서 유행하거나 알려진 패션 등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사치와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당대 청나라 백성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모양이다.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펄 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골 농촌 같은 곳에서는 서태후가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농부들은 서태후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고 '이제 우리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다만 전근대 피지배층들은 기본적으로 상위층 특히 왕가에 대한 복종의식과 존경심을 당연히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서태후가 특별히 뭘 잘해서 이런 존경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을 들어서 서태후가 재평가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은 금물이다. 당시 청나라를 포함한 전근대 중국에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당연히 천자여야 하고, 국가의 구심점 역할도 당연히 천자가 맡아야 한다. 태후가 황제의 어머니든 뭐든 천자는 아니므로, 천자가 어릴 때 잠깐 후견을 맡는 정도라면 모를까 자기가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중국의 각종 제도와 역사는 천자가 통치를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태후라고 하나 중국의 공인된 통치자도 아닌 사람이 섭정의 수준을 넘어서 대놓고 통치를 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 차라리 [[측천무후|성신황제]]처럼 본인이 천자를 했으면 모를까 천자는 안 하겠다고 하면서 천자의 통치를 전제로 한 조직을 계속 움직이려 들었으니 모순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당장은 서태후라는 썩은 기둥이라도 있어서 청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이미 그 전에 멀쩡한 천자 체제를 태후의 통치라는 썩은 기둥으로 바꿔치기한 서태후의 잘못이 훨씬 더 컸다. 청나라는 서태후 덕분에 버틴 게 아니라 서태후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서태후가 단기적으로는 청나라의 버팀목이 되어줬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청나라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셈이다. 오죽하면 서태후가 청나라를 말아먹음으로써 [[천명제|누르하치]]가 이끄는 [[아이신 기오로 가문|아이신기오로 씨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 조상(예허나라 씨족 추장)의 원수를 갚은 셈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게다가 광서제가 황제로서 매우 무능했다면 모를까, 광서제는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는 등 황제로서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서태후라는 엄청난 걸림돌 때문에 광서제 본인의 유능함이 무의미해졌고 더 나아가 광서제 본인이 독살당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권력과 사치에 집착하는 섭정이 선량하고 유능한 황제를 죽여버린 시점에서 서태후는 이미 옹호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결국 이제 막 기다 걸을 나이의 선통제가 황제가 된 후 서태후가 급사하자 권위 있는 어른이 없는 청나라 황실은 권력의 진공상태[* 여러 왕조, 황실에서 반란, 권력 분산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방계를 다 죽이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명망있고 지도력을 갖춘 방계는 황제 개인에게는 눈에 가시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이 다른 마음만 안먹는다면 황실의 권위가 되어주고 이런 위기에도 황가의 구심점이 되어준다. 서태후 치하에서 이런 황실 어른들이 다 죽거나 몰락했다는 것.]에 빠져들었다. 서태후의 뒤를 이어 황태후가 된 융유태후는 인간성 면에서는 서태후보다 아주 살짝 나았지만 황후 시절에 광서제의 후비들을 핍박하고 남편 광서제를 감시하며 오만하게 대했을 정도라 거기서 거기였고, 인품 대신 카리스마와 권모술수를 휘두르자니 이쪽은 서태후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에 황실을 지킬 수가 없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은 서태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http://m.news.nate.com/view/20091021n00585|#]], 사실 [[이원복]]이 지적한 1차 사료의 문제는 이미 이전에 나온 이야기이고, 문제는 휴 트레버 로퍼(1914~2003)와 같이 1차 사료의 허구성을 지적한 학자들도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서태후의 이미지를 대단히 나쁘게 본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서태후는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 서태후가 의화단 운동에 불을 지폈으니 반서방주의 때문에 미화한다는 낭설도 있으나, 중공의 정통 사관에서는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의화단의 통수를 치고 탄압했다고 여긴다. 즉 의화단을 미화할지언정 서태후를 미화하지는 않는다. 혁명을 추구하는 중공 입장에서 변법자강운동을 탄압한 서태후는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수구꼴통 봉건주의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 서태후에게 탄압을 받은 캉유웨이조차도 공화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때 시신이 능욕을 당했을 정도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