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후 (문단 편집) === 후궁에서 황태후로 === 본래 의귀비(懿貴妃)란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지만, [[함풍제]]의 총애를 받고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으면서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그러다 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붕어하고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와 같이 황태후 자리에 오른다.[* 청나라에서 후궁의 소생이 황제가 될 경우, 정실 황후는 당연히 '모후황태후'가 되지만 황제를 낳은 후궁도 그에 준하는 지위인 '성모황태후'가 된다. 물론 같은 태후라고 해도 선황이 더 높은 지위로 인정했던 모후황태후 쪽이 보다 높은 쪽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서태후와 유덕령[* 한족 주불대사인 유경과 프랑스인 어머니의 딸로 어렸을 적 프랑스에서 자라 서양에 정통했기 때문에 말년의 서태후가 불러 궁녀로 일하면서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서태후가 자신과 동생인 유용령(나중에 중국 최초의 현대 무용가가 된다.)을 친왕의 딸급인 군주라고 봉하여 궁내에서만 통용하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보통 덕령공주, 덕령군주 등으로 불리지만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공주는 아니다. 또한 자신이 만주족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한족이 명백하다. 이후 궁을 나와서 미국으로 이주한 뒤 회고록을 썼는데 소설식의 회고록이라 픽션이 섞여있긴 하지만 말년의 서태후와 청나라 황실을 그리는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 이 자료는 그간 서양열강의 여러 자료에 악녀로 왜곡된 서태후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을 포함한 궁녀들이 같이 찍은 [[https://en.wikipedia.org/wiki/File:The_Qing_Dynasty_Cixi_Imperial_Dowager_Empress_of_China_On_Throne_5.JPG|사진]]을 보면 위의 액자에 '대청국 당금 성모황태후 만세만세만만세'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함풍제는 죽기전 아들 동치제의 섭정을 태후인 자신과 동태후가 아닌 8대신에게 맡겼으며 특히 서태후는 8대신 중 한명인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라 서태후로선 이런 상황이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동태후와 함풍제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이힌|공친왕]]과 연합하여 8대신을 몰아내고 자신과 동태후, 공친왕 섭정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상 정변이다. 공식적으로 2명의 태후가 섭정하는 것이지만 글을 몰랐던 동태후를 대신해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서태후가 다했기에 사실상 서태후 단독 섭정 체제였으며 이후 자신에게 방해가 될 공친왕도 권력을 약화시키면서 서태후는 청나라의 1인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