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희 (문단 편집) == 중국의 동북공정과 서희 == 생전 서희는 중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서희가 사신으로 송에 갔을 때, [[태조(송)|송 태조]]도 서희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검교병부상서(정3품)[[관직]]을 주었고,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곧 고구려이고, 그렇기에 수도를 평양으로 삼았으며, 국경을 가지고 논하면 거란의 동경까지도 모두 우리 경내다."라고 말한 것은 고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후 중국의 <[[송사]]>, <[[고려도경]]>에서 일관되게 "고려는 원래 고구려다"라고 적고 있다. [* 출처 : 박용운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한 종합적 검토>] 이런 사람이다 보니 [[중국]] 학계에서, 특히 [[동북공정]]에 소속된 학자들이 서희에 대해 내놓는 평가는 박하고 싸늘하다. 서희가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라고 [[소손녕]]에게 일갈한 것을 두고 중국의 학자들은 "'''일개 [[장군]] 나부랭이가 뭘 알기나 하고 떠든 말이었겠냐'''"[* 후술하겠지만 서희는 무장이 아니고 문관이며, '일개 장군 나부랭이'로 치부될 그저 그런 가문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며 소손녕이 서희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 것은 전략적인 퇴각 내지는 소손녕의 실수이고 '''서희가 "고려가 곧 고구려다" 운운한 것은 서희의 허풍 내지 거짓말'''이라고까지 몰아세우기도 하는데, [[일본]]에서 [[안용복]]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학자 양바오룽(楊保隆)이나 장룽(張戎)은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고려는 고구려이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수도도 평양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한 말은 고려의 수도가 평양이 아니라 개경(개성)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실제 사실이 아니라 역사에 어두운 소손녕 앞에서 고려가 고구려 후계임을 강조하려고 서희가 일부러 즉석에서 지어낸 '''속임수가 섞인 거짓말이자 궤변술(詭辯術) 내지 말장난(文字遊戱)'''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楊保隆, '論高句驪與王氏高麗無前後相承關係'(社會科學 戰線, 1999-1) 158쪽 및 蔣戎, 遼朝與高麗朝貢關係淺析(東北史地, 2008-6) 33쪽] 중국의 학자 정촨수이(鄭川水)[* 이 사람은 2006년에 <역대 중국 왕조의 동북 변경 통치 연구>라는 논문에서 "'''[[전국시대]] [[연나라]]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해 진번조선과 국경을 마주했다'''"는 주장을 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60906/8347818/1|#]]]의 경우는 "고려는 신라를 계승해 건국된 것을 서희가 옛 고구려(高句麗之舊)라고 거짓말했으며, 그리고 당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치소인 평양을 고려가 멋대로 서경으로 바꿔 부르고 고려의 대도호부(大都護府)를 평양에 둔 일을 ‘수도를 평양에 정했다(都平壤)’고 속였으며, 거란의 영역인 압록강여진(鴨綠江女眞)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며 거란에 요구했고, 또한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할 합법적인 왕조라고까지 주장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 鄭川水, 2003-1, 遼聖宗及遼與高麗藩交考略 , 《遼寧大學學報》, 33~37쪽] 정촨수이는 더 나아가서 엄연히 거란의 영역 안에 여진인들이 살고 있던 곳을 서희가 멋대로 ‘고구려 옛 땅(高句麗舊地)’이라 속여서 고려가 그 지역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소손녕에게 요구하고 거부당하자(?)[* '고려는 고구려이다'라는 서희의 주장에 소손녕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당시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한 것에 요 성종이 '''영토 주권을 양보하는 매우 믿기 어려운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으며, 이후 거란은 고려로부터 강동 6주를 반환받기 위해[* 반환받기 위해서라는 말이 웃긴 게, 강동 6주는 고려가 '''그 지역을 점거한 여진을 내쫓고 차지한 땅'''이지 애초에 거란이 실효지배한 적이 없다. 여진 이전에는 당연히 발해, 고구려령이었다.] 일곱 번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고려에 대한 군사적 침공까지 했던 것이라고, 서희의 협상이 거짓과 궤변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물론 '''[[여요전쟁]]의 발발까지도 고려에 그 원인을 돌려 버리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鄭川水, 2003-1, 앞의 글, 34~37쪽. 이밖에 중국의 학자 임형귀(林榮貴)는 요 성종이 압록강 동쪽 수백 리를 고려에 '하사'한 것은 고려로 하여금 신하의 절도를 잘 지키게 하고, 동시에 고려의 북진 정책을 정지한다는 교환 조건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林榮貴, '北宋與遼的邊疆經略', 《中國邊疆史地硏究》, 2000-1, 34쪽) 임형귀의 주장과는 달리 고려는 거란에 대해 신종한 적도 없고, 멸망하는 순간까지 북진 기조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압록강]] 유역이 애초에 고구려령이고[*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애초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유민]][[발해|들의 반발]]로 당나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신성으로 옮겨야 했을 정도로 제대로 통치하지도 못한 데다 당이 멸망한 뒤에는 '번인(여진인)들이 멋대로 드나드는 황폐한 땅'[* 삼국사기 궁예열전에서 궁예가, 고려사 태조세가에서 왕건이 모두 공통되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으로 변할 정도로 통치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점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것은 물론, '''고려에서 평양이 서경(西京)이라 불리며 고려 왕조 내내 준수도급 대접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희가 소손녕 앞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중국 학자들의 지적은 다분히 악의적인 것을 넘어 제대로 역사를 왜곡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애초에 고려처럼 수도를 한 곳에 두지 않고 여러 곳에 나눠서 두는 것은 [[삼경제]]를 운영했던 [[고구려]]나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에도 [[웅진성]]을 부수도로 두고 [[익산]]에도 따로 수도를 세우기도 했던 [[백제]], 삼한일통 이후 확장된 국토에 9주 5소경을 운영했던 [[신라]],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두었던 [[발해]] 등 고려 이전의 한국사에서 이미 선례가 충분히 존재해 왔다. [[당나라]]에서도 [[장안]]과 [[낙양]]을 동서 양경(兩京) 체제로 운영해 모두 수도처럼 운영했고, [[요나라]]나 [[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류의 '부수도'를 아무래도 왕이 실제 상주하는 [[궁성]]이 있는 수도(왕성)와의 1:1 비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훈요십조에서 왕건 본인이 서경에 대해서 "'''후대 왕들은 서경에서 연중 100일은 머물러라'''"라고 명기한 것을 볼 때 서경을 마냥 껍데기뿐인 [[행정수도]] 취급만 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의 별도로 운영되었던 동경(경주)이나 남경(서울)도 이 정도 우대는 받지 못했다.] 굳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외의 다른 시각에서 서희의 외교와 그 영향을 바라보고 평가할 여지를 한국 학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서희의 말이 거짓말이고 궤변이라고 몰아붙이는 한편으로 거란의 입장에서 고려에서 철군하게 된 상황을 분석하는데, 거란의 입장에서 일단 '1차 상대'라고 부를 상대는 당연히 남쪽의 송이었고, 후방의 고려가 송과 통교하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마치 [[명청교체기]] [[후금]]과 [[명나라]], 그리고 [[조선]]의 구도와 같다. 그리고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간 이유와 마찬가지로 거란 역시도 송과의 전쟁을 위해 후방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고려에 대한 침공을 결정했다. [[청태종]]과는 달리 고려의 [[봉산군]](蓬山郡)을 차지한 거란의 소손녕은 그 시점에서 더 남진해서 [[개경]]까지 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속히 투항하고 얼른 땅 내놔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오는데, 서희는 이 시점에서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和議)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有可和之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2, 성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12년조.]고 주청하면서 당시 고려 조정에서 일던 할지론을 무위로 돌리고 협상에 나섰다. 흥미롭게도 서희는 거란의 군사 동원을 ‘거란이 침공했다(契丹之侵)’이 아니라 ‘거란이 왔다(契丹之來)’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화의를 주청한 시점에서 이미 거란이 현재 고려로 더 치고 내려올 생각이 없고 그저 군사를 동원해 유세를 떠는 것임을 서희는 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의 소손녕이 거느린 대병력이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 고려 멸망이나 영토 획득보다는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인 고려 지역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었고 그 철수도 순전히 협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거란 입장에서도 다분히 전략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는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이다. 서희와의 협상 직전에 고려 조정에서 이몽전을 보내 소손녕과 만난 자리에서 소손녕이 온 이유를 물었을 때, 소손녕은 "너의 나라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 이제 우리가 천벌을 대행하러 왔다(汝國不恤民事, 是用恭行天罰)"고, 자신들이 고려로 쳐들어온 이유를 '고려가 백성들을 잘 살피지 않아서'라고 대고 있다. 협상 이후 고려의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 회복이나 '선 여진 축출 후 거란 수교'를 골자로 하는 소손녕의 협상 결과를 전해 받은 요 성종은 "'''고려가 이미 화의를 청해 왔다. 군사를 돌리라'''"(高麗旣請, 和宜罷兵)고 명령해 거란은 고려에서 철수했다. 고려 영토 획득이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일단 소손녕의 거란군에게는 부차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소손녕으로서도 마냥 고려에 머무르며 고려와의 일전을 벌이기도 힘들었던 것이, 서희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에는 이미 [[양규]]가 흥화진에서 결사대를 이끌고 앞서 거란이 점령했던 후방의 곽주를 탈환했고, 고려에서 답이 없자 소손녕이 화풀이 삼아 공격한 안융진(安戎鎭)에서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 고려에 귀부했던 발해 태자 [[대광현]]의 아들이라 전한다.] · 낭장(郞將) [[유방(고려)|유방]](庾方)[* 고려의 명장이자 개국공신인 [[유금필]]의 손자이다.]에게 패전을 겪은 상태였다. 화끈하게 차라리 전쟁 한 판 가자면 소손녕으로서도 못할 바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후방에서 치고 내려올 양규나 대도수, 유방의 고려군과 전방에서 항전을 각오할 고려 조정 및 고려 남부 지방군과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거란이 승리하더라도 송과의 대치 상태에서 중요한 병력을 까먹는 분명한 양패구상(兩敗俱傷)[* 양쪽이 아무 이익도 못 얻고 피차 손해만 보는 것을 말한다. [[피로스의 승리]]와 비슷하다.]이 되기 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희는 소손녕이나 요 성종에게 물러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체면'[* 중국어로는 미엔쯔(面子)라고 부르는데,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체면은 때로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을 살려준 것이다.[* 성종 13년(994년) 고려 조정에서 거란의 통화 연호를 처음 사용하고 넉 달 뒤인 6월에 고려에서는 원욱(元郁)을 송에 사신으로 보내서 "송의 군사를 빌려 작년 거란과의 전투에 복수하고 싶다"고 알렸는데, 송에서는 "북방 국경이 이제 겨우 편안해졌는데 군사를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며 원욱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 보냈고, 이때부터 송과 공식적으로 단교했다고 고려사 성종세가 및 『송사』(宋史) 권5 본기(本紀)5 태종(太宗)2 돈화(淳化) 5년 6월 무신일 기사 및 같은 책 고려열전에도 실려 있다.] 즉 고려는 거란과의 협상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인정받고[* 적어도 송사 및 고려도경에서는 고려가 고구려라고 해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인정했다. 요사 고려열전은 "고려는 나라가 있은 이래로 서로 왕위를 전해온 것의 길고 짧음이나 그 인민(人民)ㆍ토전(土田) 등에 대해서는 역대 사적에 각기 그 기록이 있는데, 고려가 요와 더불어 지낸 것은 요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2백여 년이다(高麗自有國以來,傳次久近,人民土田,歷代各有其志,然高麗與遼相為終始二百餘年)"라고만 했다. 대충 "고려의 선대를 보고 싶으면 다른 역사책에 나오니 찾아 봐라"라는 뜻.] 동시에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수복하는 실익'''을 얻었지만, 거란도 반대 급부로 고려로부터 자신들의 요나라가 중국의 여느 '정통' 왕조처럼 정삭(正朔)을 가진 정통성 있는 왕조[* 정삭이란 달력을 말하며, 당시 달력을 만들기 위한 기준이 되는 [[연호]]는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라는 인정, 나아가 송과의 대치 상황에서 후방인 고려 방면의 안정을 군사적 정복 없이 무혈로 얻어내는 동시에 고려와 송의 군사동맹을 표면적으로나마 와해시켜[* 공식적으로는 고려와 송이 단교했지만 이후로도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거란도 이를 뻔히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 '''고려 방면에 남겨 두어야 할 힘을 온전히 송으로''' 쏟을 수 있었다. 중국 학자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요 성종이 '강동 6주 할양'이라는 서희와의 협상 결과를 수용한 것이 마냥 '퍼주기 협상'은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강동 6주가 전략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땅인지를 거란은 뒤늦게 알게 되고, 이 상황을 다시금 무력으로 되돌리기 위해[* 애초에 요 성종이나 소손녕이나 강동 6주를 온전히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령 지금 고려의 영토로 인정해 주더라도 나중에 또 힘으로 을러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요 성종이나 소손녕의 '도둑놈 심보'가 17세기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이라면 어느 정도 통했겠지만, 10세기 고려에는 씨알도 안 먹혔다는 것이다.] 벌인 전쟁은 제대로 고려 땅에서 피를 보고 끝나면서 거란이 꿈꾸었을 장밋빛 미래는 무너졌지만, 이건 훨씬 후대의 협상 외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정촨수이는 서희가 고려가 고구려라는 주장이 소손녕에게 먹히지 않자(?) 방향을 바꾸어 '''거란과 송의 대결 국면을 이용해''' 송과의 조빙을 거란으로 바꾸는 것과 ‘고구려 옛 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바라며 그 땅을 고려에게 양보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며 서희를 '요 성종과 소손녕을 상대로 사기를 친 궤변가에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상대의 내부 사정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 동시에 협상을 통해 서로 피차 체면과 실익을 살려 주는 것도 엄연히 훌륭한 협상 능력이자 탁월한 외교술이다. 이건 분명하게 고려 외교술의 승리이고 서희라는 인물이 고평가되면 고평가되었지, 정촨수이의 주장처럼 마냥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정촨수이가 서희를 '궤변가에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요 성종이나 소손녕이 그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주장은 삐딱하게 생각하면 고려가 거란을 상대로 외교면에서도, 그리고 군사면에서도 제대로 발라 버린 흑역사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라고 할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