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달개 (문단 편집) === 군사 활동 === 1851년 1월 홍수전과 석달개를 비롯한 태평천국의 수뇌부는 광서성 금전촌에서 20,0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태평천국]]의 공식적인 출범을 선언했다. 5월, 광서성의 태평군은 강력한 공격을 펼치고 있던 청군에게 쫓기고 있었다. 인의(仁義)의 수문에서 석달개는 300명의 병력으로 잠입 작전을 펼쳐 5,000명의 적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8월 태평군이 영안성을 점령했을 때, 석달개의 신사적인 통치와 공정한 행정으로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은 석달개의 명성에 끌려 자발적으로 태평천국에 합류했다. 10월, 홍수전은 그 당시 '''20세'''의 석달개를 익왕(翼王) 성광지왕(聖光之王)에 봉했다.[* 태평천국 역대 최연소 왕.] 석달개는 이후 천경을 향한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석달개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태평군을 지휘하며 청군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태평천국과 청나라는 모두 석달개의 선정과 태평천국의 영토마다 울려퍼지는 석달개의 승리를 찬양하는 민요에 대해 기록했다. 천경의 요새화 작업을 하던 중 석달개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성취는 '''안경역제'''(安慶易制, 안칭 개혁)였다. 1854년, 석달개는 안경에 도착해서 군사와 민간의 일을 전담하면서 농업을 고무하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상거래를 촉진하고, 효율적이고 투명한 관료제를 위한 현지 인재를 영입하는 자비로운 법질서를 세웠다. 석달개는 심하게 악화된 치안을 회복시키기 위해 민간인들에게 병사들의 횡포를 보고하기를 장려하고 공정하게 처벌했다. 석달개의 행정 몇 달 후 안경은 태평천국에서 가장 충성스럽고 요새화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855년 석달개의 후커우 전투는 가장 극적인 태평천국의 승리 중 하나였다.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 수사(湘軍 水師)는 청군의 정예부대로 여겨졌다. 석달개는 12월에 전쟁터에 도착했고, 태평군이 이미 심각한 패배를 당한 상태에서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석달개는 꼼꼼하게 전투를 계획했는데, 철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적진을 지속적으로 타격할 소형 함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댐으로 청의 군함을 뒤집고 상군을 반으로 쪼갰다. 석달개는 태평천국에 큰 승리를 안겨주는 유연한 공세를 이끌었고, 증국번은 이에 자살을 시도했으며[* 죽지는 않았다. 그런데 증국번 본인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던지 주변 사람들한테 자신이 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이 부하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큰 망신을 당했다.] 이후에 석달개를 "태평천국에서 가장 노련하고 강한 자"라고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