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달개 (문단 편집) === 외로운 원정길 === 1857년, 석달개는 천경을 떠나며 백성들에게 태평천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달라는 시를 쓰고,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따라오도록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석달개를 따라가고 이로인해 태평천국에 얼마나 피해가 왔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석달개의 부관이었던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은 '석달개가 수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태평천국에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에 반박하는 약간의 사료가 있는데, 석달개는 천경에서 작은 병력만을 빼내 왔고 청나라의 기록에서는 석달개의 행렬이 통징강을 하루 만에 건널 정도로 작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경을 떠났을 때도, 석달개는 태평천국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홍수전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태평천국의 여러 지휘관들이 전투를 치를 때 병력을 보내 주었다. 석달개는 홍수전이 자신의 지휘권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때까지 천경으로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다. 원정의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석달개에게 합류했다. 석달개는 6년 동안 중국 중부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청군과 맞섰다. 오늘날까지 석달개에 관한 많은 전설들이 그가 지나갔던 지역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이 천경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몇몇 석달개의 장교들은 태평천국을 뒤엎도록 부추겼지만 석달개는 번번이 거부했다. 결국 병력의 일부는 석달개와 떨어져 천경으로 돌아갔다. 원정 중 석달개군은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성을 오갔다. 1862년 12월 석달개군은 청군의 막강한 포화를 따돌리며 금사강을 건넜다. 그들은 다두의 둑들을 건너 청두에 가려고 계획했다. 석달개의 수하 중 하나는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석달개와 주력군이 도착했을 때는 갑자기 폭우가 내려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몇 번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보급까지 떨어졌다. 청군은 며칠 간격으로 추격하고 있었다. 석달개가 건너려다 실패한 교량은 노정교(瀘定橋, 루딩교)라고 하는데, 수십년 뒤 [[중국공산당]]의 [[대장정]] 때의 가장 극적인 교전이 이 곳에서 벌어졌다. 석달개와는 달리 공산군은 도하에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