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륵 (문단 편집) === 전조를 멸하다 === 328년,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 있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했다. 유요는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며 석호는 크게 패배하여 낙양 일대를 유요가 포위했다. 낙양 포위전은 3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했다. 유요는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여 석륵의 구원군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이로 인해 포위를 풀고 낙양 북서쪽 금용성에 포진했다. 12월 5일,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유요가 술에 취한 채로 지휘했기 때문에 석륵은 크게 승리하고 달아나던 유요는 말에서 떨어져 포로로 잡혔다.('''금용 전투''') 석륵은 유요를 잡아 수도 양국으로 압송한 다음 유요의 아들 [[유희]]에게 항복을 권하게 했지만 거절당하자 유요를 처형했으며 329년에는 유희가 반격을 개시했지만 승리했고, 반격하여 상규로 도망쳐 있었던 유희 등 전조의 잔당을 토벌하고 전조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330년 2월에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했으며, 뒤이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했다. 333년, 석륵이 병으로 몸져 눕자,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석호가 황궁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석륵은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석호를 수도에서 내보내려는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레임덕|이미 황궁을 석호가 강력하게 장악한 상태에서 석륵의 명령은 먹히지 않았고, 석륵은 자신의 이런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면 그렇게 한 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마지막 총기를 보여주었으나 이미 그의 시대는 끝나 있었고, 해당 조치는 너무 늦어 있었다.]] 7월에 석륵이 붕어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산기슭에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했다. 이전에 석륵은 모후인 왕씨를 산계곡에 몰래 묻은 다음 유목민의 장례인 '[[비장]]'으로 치렀으며, 석호는 평야에 가짜 고평릉을 만들어서 석륵의 능 도굴을 막으려는 노력을 했다. 석륵의 뒤는 차남이자 태자 [[석홍]]이 이었으나 곧 [[석호(후조)|석호]]에게 찬탈당하고 살해되었다. 석륵이 살아 있을 때 일부 신하들은 석호를 처리하도록 했지만 석륵은 망설이면서 미루다가 끝내 처리하지 못했다. 영명한 군주였던 석륵이 말년에 한 실수 때문에 그 아들 석홍은 폐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그 뒤 석륵의 자손들은 제 명에 살지 못하거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