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산(북한) (문단 편집) == 생애 == 1902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빨치산 토벌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도피, 오케안스크 근처 국영농장에서 [[김창봉(북한)|김창봉]], 김병갑, [[오백룡]], [[지병학]], [[백학림]] 등과 함께 소련군 정찰부대로 복무하였다. 덕분에 러시아어도 매우 능통하였으며 특별계층이라고 미움을 받던 고려인들과도 잘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리상조]]와 허웅배가 공저한 임은의 북조선왕조비사에서는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사실상 소련인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한다. 해방 이후 1945년 10월, 서북5도당책임자급 열성자대회에 대표로 참석,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내무부장을 하다가 1948년, 민족보위성 창설과 함께 민족보위성 산하 정치보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안전국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이후 내무성 제1부상에 임명, 내무군 상장이 되었고 1959년 7월에는 대장으로 진급하여 민족보위성 부상을 지내기도 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1960년 11월 11일, [[방학세]]의 뒤를 이어 신임 내무상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62년 10월에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3기 내각에서 사회안전성이 신설됨에 [[박문규]]에게 내무상 자리를 물려주고 사회안전상에 임명된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12월, [[김일성]], [[최용건]], [[김광협]], [[김창봉(북한)|김창봉]], [[최현(북한)|최현]], [[리영호(1910)|리영호]]와 함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승진, 비서국 비서로 선거된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사회안전상에 유임되었다. 1968년 2월 3일, [[김창봉(북한)|김창봉]], [[허봉학]], [[최광]], [[오진우]], [[오백룡]]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1급, 금별메달을 받았다. 1969년 1월, 김창봉, 허봉학 숙청에 휘말려 같이 숙청당했다는 말도 있지만 1970년까지도 계속 활동하였다. 다만 1969년에 [[김병하(북한)|김병하]]에게 사회안전상을 물려준 것은 확인된다. 말년의 석산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많은데, 1968년 혹은 1969년에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많지만 정작 북한 문헌에서 그를 부수상으로 호칭한 기록이 없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다만 비서에서는 1969년 시점에서 이미 해임된 상태였다는 헝가리 대사관 기록이 있다. 1970년 4월, 레닌 탄생 100주년 평양시 기념대회 참석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이후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확실하게 탈락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때도 흔적이 없었다. 1979년에 집필된 北韓人物錄에서는 1970년에 국방경제병진노선에 반대해서 숙청당했다고 나와 있고, 여정은 그가 1971년에 숙청당했다고 회고하는데, 5차 당대회 때 안보인 것을 봐서는 1970년 숙청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조연준]] 회고록에서 사회안전상 재직 시절 선전선동부 부과장 김량남을 민생단 분자로 몰아서 지방으로 보내버렸다고 나쁘게 나오는 것을 봐서 북한에서 썩 대접이 좋은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다만 [[김광협]]과 달리 반당반혁명종파분자라는 악평까진 보이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