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주명 (문단 편집) === 인간 관계 === 석주명의 여동생 [[석주선]](石宙善 1911~1996)도 유명한 인물로, [[한복]] 등 한국의 전통의상 및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였다. [[1.4 후퇴]] 때 피난을 가면서 자신의 자료들과 함께 석주명의 나비 [[표본]] 및 연구 문서들을 함께 챙기려 했는데, 석주선의 자료는 옷이란 특성상 부피가 너무 커서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석주명의 나비 자료만 챙기고 자신이 연구한 복식 자료는 보따리에 싸서 편지를 써놓고 기둥에 매달아 놨는데,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남겨뒀던 옷은 단 한 벌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주선은 처음부터 다시 옷들을 모아야 했고, 이렇게 모은 옷들은 [[단국대]]부속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석주선기념박물관을 세웠다.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것과 별도로 인간관계는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엉망이었다. 부인 김윤옥과[* 김윤옥은 두 번째 부인으로, 남편에게 복종을 강요하던 당시의 여성관을 거부하는 신여성이었다. 사실 석주명은 첫 번째 부인이 자식도 없이 요절한 후 재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보다 못한 부모가 김윤옥과 중매를 서주며 압박해서 마지 못해서 재혼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부인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사이가 매우 나쁘기로 유명해서, 이런 가정사가 당시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석주명 본인의 성격이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외골수인데다[* 얼마나 고지식했는지 돈이 있는데도 가방이 다 떨어질 때까지 썼다. 보다못한 부모와 부인이 바꾸라고 해도 절대 안 바꾸었다. 게다가 [[신혼여행]] 가서도 부인이 식당에 가서 사먹자는 것을 거부하고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이러니 부부관계가 초반부터 틀어졌다. 게다가 연구에 몰두한다고 집에도 오지 않고 연구실에만 있었고, 급여도 연구비로 대부분을 써버리고 부인에게 생활비를 적게 주니, 생활고에 시달린 부인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교사]]가 안정적인 봉급을 받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1등 신랑감으로 꼽혔는데 현실이 이랬으니...] 부인은 정반대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심한 가정불화 끝에 딸 하나만 남긴 채[* 딸 이름은 석윤희인데, 아내가 데려가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나중에 석윤희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북일리노이 주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다.[* 게다가 자신이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부인을 돈타령만 하는 속물이라고 몰아붙이며, 끝까지 부인과 화해하거나 가정에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인터뷰한 기자가 이혼에 대한 소감을 묻자 "오히려 편하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애초부터 가정에 신경 쓸 생각 자체가 없었던 셈. 워커홀릭 중에서도 상 워커홀릭.] 당시 신문에서는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며 그의 사생활을 가십거리로 다뤘다. 훗날 딸의 증언으로는 자세한 것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고모 석주선이 오빠를 감싸주는 것 때문에 둘 사이를 악화시켰다고 한다. 특히 부인 김윤옥과 시누이 석주선 간 관계는 매우 나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석주명이 고지식하면서 가정에 무관심한 것이지만[* 물론 집안의 강요로 인해 원치않는 결혼을 한 탓에 결혼 생활에 무심했던 것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뒷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도 자신과 똑같이 정규교육받은 여성과의 연애결혼을 원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김호남]]이라는 여성과 강제로 결혼을 시킨 바 있었는데, 결국 원치않는 결혼인데다 본인의 이상형과는 정반대로 일자무식이었던 김호남에 정을 붙이지 못한 그는, 부모가 모두 사망한 뒤에 훗날 영부인이 된 [[육영수]]와 교제하기 시작하면 그녀를 가차없이 쫓아내버린 바 있다.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략결혼]]을 실시하는 일이 흔한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양상인데, 이런 이유로 인해 타인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배우자를 무시하거나 내쳐버린 경우라면, 결혼을 강요받은 쪽이 어느 정도 동정을 받기도 한다.]. 특히 석주명은 [[완벽주의]]자에다 고집이 너무 강해서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대인관계도 영 좋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잘 해주는가 하면 질책을 많이 하다 보니 역시 관계가 좋지 않았다. 휘하의 실습생들에게도 갑질을 하여 그들이 석주명의 [[갑질]]에 빡친 나머지 사과하라고 시위까지 했는데, 석주명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질책했다. 결국 휘하 실습생들이 화가 치밀어 집단으로 그만 둔 탓에 석주명은 휘하에 실습생이 한 명도 없어 혼자서 연구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보다 상하관계에 훨씬 엄격하던 시절이라 요즘 같으면 갑질이라고 비난받을만한 행동도 당연시 되며 넘어가던 시대였는데도, 아랫사람들이 스승에게 집단으로 항의할 정도였으니 석주명의 평소 행동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