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교사 (문단 편집) === 선교사와 근세 제국주의 === 선교사들이 토착민과 함께 식민지배나 학살 등에 저항했던 기록도 있고,[* 이를 [[모티브]]로 차용한 영화가 [[미션]]이다.] 타 문화에 대한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겼다. 선교사가 원주민 보호에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선교사가 결국은 그 식민제국주의 열강의 문화 안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서다.[* 지역 토속신앙 믿는 성직자가 나서 봤자 [[이교도]]에 불과했다.] 타문화에 대한 조사나 기록도 원주민 문화의 요소가 자기들이 선교한 기독교 문화 안에 스며드는 것을 가려내서 박멸하려고 쓴 것인 경우도 있다.[* 스페인 선교사인 [[https://en.wikipedia.org/wiki/Diego_de_Landa|디에고 데 란다]]의 [[https://en.wikipedia.org/wiki/Relaci%C3%B3n_de_las_cosas_de_Yucat%C3%A1n|유카탄 견문록]]에선 마야 문자와 알파벳을 대조한 사례와 함께, 마야인의 이교 문서들을 모조리 없앴다는 내용이 실렸다.] 물론 덕분에 우리는 좋은 기록 보는 셈이지만. 같은 책이 이런 경우다. 원주민의 인권보호에 힘쓰거나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교사들은 본국으로부터는 숱하게 정치적 배신자로 비난받았지만, 그나마 이들은 도덕성이라는 무기가 있어서 당대에 선교사가 [[제국주의]]를 비판할 경우, 일단 무슨 말인지 주의 깊게 경청할 확률이 높았다. 이를테면 1511년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 수사가 "당신들은 [[무어인]]들이나 [[투르크인]]들보다 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히스파니올라의 에스파냐인들에게 경고하자, 에스파냐인들은 이 [[팩트폭력]]을 그대로 경청해야 했다. 안토니오 수사 등의 이러한 정신은 본국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도미니코회]] 회원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 신부는 저서 인디아 문제(De Indis)에서 자연법과 스콜라 사상을 동원하여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하게 된다. 그리고 <인디아 문제>는 국제법의 기원이 된다. 16-17세기 이베리아 가톨릭 국가들의 제국주의는 여전히 근대 민족 국가란 개념이 떠오르기 한창 이전이고[* 스페인의 예를 들자면 스페인 제국이 잘나가던 16세기-17세기 중반까진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가 없었다'''. 통상적으로 스페인, 스페인이라 부르긴 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카스티야 군주국과 아라곤 군주국의 연합'''이었고, 이 내부적으로도 카스티야 내엔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 왕국, 세비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아라곤의 경우 카탈루냐 공국, 발렌시아 왕국 등 중세적 자치권을 여전히 유지하던 많은 봉건 정치체의 연합이었다.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 행정, 사법적으로 통합된 통일 스페인 왕국은 1716년에 탄생했다.] 세속의 국가와 권력자들이 종교를 이용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깊었지만, 종교계가 거기 응해서 마음대로 세속의 논리에 휘둘리기 이전 시대의 일이다. 이 분야에서 대표 주자인 스페인만 하더라도 [[살라망카]] 대학에 본적을 둔 [[도미니코회]] 소속 법학자, 신학자, 선교사 세력이 상술한 안토니오 몬테시노스 수사를 필두로 이후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이 분야에선 너무도 유명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같은 유수의 지식인들을 배출하며 끊임 없이 '''제국의 정치적 팽창 없이 순수한 선교로만 이루어지는 복음의 제국'''을 주장했고, 왕과 고위 귀족의 고해 신부나 스승 역할을 하며 중앙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톨릭 보편 제국을 추구했던 스페인 제국의 이데올로기에도 부합하는 면이 많아 탐욕스럽지만 카스티야 본토에서 뒷배경은 한미했던 [[콩키스타도르]]들이 함부로 싸울 수 없는 세력이었다. 창설 당시 부터 애초에 선교 방침을 세계선교로 잡으며 현지 문화 존중, 현지 언어 학습, '''종교만 뺀 나머지 모태 문화의 보존'''을 추구한 예수회도 비슷했다. [[미션]]에 나오는 주인공 선교사가 본국에서 배신자 취급 받아 토벌당하는 모습은 이러한 풍조가 약화되었을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영화 배경이 한 100년만 빨랐어도 본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긴커녕 여전히 중세적 교권주의가 강했던 스페인에서 오히려 자기편 권력자들을 동원해 콩키스타도르들을 찍어 눌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실제 역사상 [[예수회]]는 1755년에 파라과이에서 추방되었으나, 불과 100여년전에는 예수회에게 훈련 받은 과라니족 4,000명이 왕실에게 무력사용 승인 받아서 포르투갈인(+투피족)의 침략을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Mboror%C3%A9|격퇴]]했었다. 막상 원주민 강제노역 문제 자체는 집행능력 문제와 이권 관련된 이중성 때문에 크게 실효는 못봤지만 어쨋든 16세기 중반 수많은 폐혜를 초래한 엔코미엔다 실질적 원주민 노예제를 법적으로나마 해체한게 딱 이렇게 선교사, 지식인 세력이 자기편 권력자들을 동원해서 콩키스타도르들의 탐욕을 조진 사례에 해당한다. 근대 이전이라도 유럽 식민제국들이 딱히 착한건 아니지만 후대 노골적인 민족국가적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사회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면 나누었지 (유사)생물학적 근대적 인종 관념은 희박했으며, 스페인 자체도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가열찬 비난과 안티질에 맞서 자국의 도덕성을 어필할 정치적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선교사들, 특히 특정 교파에서 특정 장소로 파견하는 선교사의 경우 최소 평균, 사실상 그 이상의 교육을 받고, 적어도 기독교계 내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 많아서, 정말 큰 사건 혹은 상황이 아니고서야 선교사를 함부로 취급하는 경우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찾아보면 꽤 나오겠지만, 유럽의 몇백년에 걸친 유구한 역사 전체와[* 더군나나 유럽은 그 시작부터 기독교와 함께했다.] 비교하면 상당히 적었다. 물론 이렇게 좋은 선교사만 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걸쳐 구 [[잉카 제국]]령 [[안데스 산맥]] 창카인들이 살았던 아푸리막 일대에서 오지 특유의 고립성과 선교사로서 위치를 악용해 엄청난 강간, 약탈, 고문을 일삼았던 후안 바티스타 데 알바단 같은 동시대에서도 지탄받았던 인면수심의 선교사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원주민 보호 행위를 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이 박해받고 비참하게 가난해지기를 바란 선교사도 있다. 19세기에 [[마푸체]] 땅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Fray Palavicino같은 자가 바로 그런 위선자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