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교사 (문단 편집) === 선교사와 근대 제국주의 === 18세기에 들어가면서 이런 중세 말-르네상스 유럽의 보편제국 이데올로기가 확실하게 한물 간 발상 취급 받으며, 국민 국가란 관념이 본격적으로 부상한 다음에야 예수회 탄압을 필두로 저런 세속적 팽창 없는 순수한 신앙의 제국주의란 사조가 사라질 수 있었고, 세속정부와 선교사의 커넥션이 이전보다 후자의 노골적인 어용화 방향으로 변질된다. 스페인은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강력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스페인, 포르투갈 자체에도 [[계몽주의]]의 바람과 여기의 어두운 면인 근대적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슬슬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완고하게 중세적 가톨릭 보편제국을 국시로 삼았던 [[압스부르고 왕조]]가 프랑스식 '근대화'를 표방한 [[보르본 왕조]]로 교체되면서 이런 '근대화'의 이름으로 저지른 더 악랄하고 차별적인 형태의 제국주의가 성장할 토양이 조성됐다. 결국 19세기로 넘아가면서 제국주의의 투톱이라면 영국과 프랑스라 할 수 있는데, 영국의 경우는 어디어디를 정복할지 중앙정부가 목표잡고 활동하는 계획적인 식민제국이 아니었고 애초에 본국에서도 [[성공회]] 특유의 참으로 애매모호하고 가톨릭, [[칼뱅]]주의 급진 개신교 양측에선 회색분자 같은 성격 때문에 국가권력과의 유착도 더 약했다.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가 상당히 애매해진 상태였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래도 국민 다수는 가톨릭 신자였고 교회는 사회적 존경을 받기는 하였으나, 혁명 뿐만이 아니라 교황청의 정책 때문에라도 '제국주의와 커넥션이 있는 선교'를 계획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령 조선 선교로 유명한 [[파리외방전교회]]의 경우 그 태생부터가 세속정부와의 커넥션을 줄이려는 [[교황청]]의 의도에 있었기에 [[프랑스]] 정부에 지배당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가톨릭]]의 기존의 선교 방식은 [[스페인]], [[포르투갈]]이 '왕의 보호권(patronato real)'을 통해 선교사와 강한 커넥션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세속이 선교에 깊숙이 개입하며 교황청의 계획대로 선교하는 데 걸림돌이 되자 선교권을 교황청이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것이 파리외방전교회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세속 정부와는 따로 놀게 된다. 이를 보여주는 면이 바로 자금인데, 초기에는 [[파리외방전교회]]도 왕에게 상당한 원조를 받아 운영했지만, 1822년 리옹에 전교회(Pontifical Society of the Propagation of the Faith)가 설립되면서 이 회를 통해 선교 자금을 전액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조선 선교 계획 역시도 프랑스 정부가 구상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할 때 외방전교회는 로마로부터 조선 포교지를 전담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외방전교회는 오랫동안 망설였으나 결국 한국진출을 수락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은 프랑스 국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외방전교회 자신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니다. >---- >-〈파리 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의 意義 - 한국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몬시뇰]]) 물론 [[병인양요]]가 프랑스 선교사의 피해를 구실로 이루어지기는 했으며, 19세기 프랑스인들이 선교사를 사람A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을리야 없지만, 타지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설령 선교사가 아니라 무역상이였더라도 구실을 잡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우겨댄게 이 시기 제국주의였으며(예: 아편전쟁), 최소한 프랑스 정부가 계획적으로 선교사를 보냈다거나 하는 건 아니였다. 하지만 이 시에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큰 격차로 앞서나가면서 비서구인이 인식하는 선교사 인상에 '오만하다'는 이미지가 끼게 된다. 16-17세기에 첫 기반을 닦고 비교적 꾸준하게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아메리카]]나 [[인도]], [[아프리카]]의 무역 조차지 근처 해안 지방 같은 곳들과 달리 [[아편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통일 중화제국의 공식 이념인 성리학이 지배했던 동아시아는 16-17세기에는 거의 대중 선교 없이 소수의 식자층, 상류층 상대로만 선교 작업이 진행되다 17세기 후반 대규모 선교사 추방으로 한번 명맥이 끊긴 후 다시 열강의 중국 침탈기에 다시 들어왔다. 처음엔 포르투갈, 스페인 왕의 보호권과 연관된 외부인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수백년간 선교 활동과 지방 공동체 형성 과정에 참여하면서 선교사와 개종자 커뮤니티가 비교적 유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의 일부로 녹아들 기회가 있었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미 고도의 발전되었고, 독점적인 정치 종교가 있었던 동아시아에서 선교사들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함께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들의 고유 종교, 문화, 신앙 체계를 미신이라 갈아 엎으려고 들고, 이걸 막으려고 관과 법에 호소하면 오히려 열강 공사관의 권력을 빌려 폭거를 일삼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특히 관의 통제력은 서양 '오랑캐'들에게 숱한 연패를 겪으며 바닥에 떨어졌고, 잇따라 비적, 도적 같은 집단들이 창궐했던 [[청나라]] 말기 중국의 경우 도적이나 강간범, 사기꾼 같은 인간들이 사고치고 [[치외법권]]을 누렸던 기독교 교회에 들어가 형식적으로 '개종'했다면 선교사들이 오히려 연줄과 정치 권력을 이용해 이들을 비호해주는 등 비리가 많았다. 당장 [[의화단]]의 본진 같은 지방인 [[산둥성]] 서부 지방만 하더라도 당시 오만하고 고압적인 선교 방식과 교단 내부 지나친 독일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던 독일계 [[슈타일러 선교회]]가 횡포부린게 직접적으로 의화단의 반기독교적 성향에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 Joseph W. Esherick, '의화단의 난의 기원', 3장 출처] 한편 19세기 북아메리카나 호주, 뉴질랜드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백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교육했는데, 이 교육이라는 것이 질도 낮을 뿐더러 원주민 문화를 탄압하고 백인들의 문화를 강제주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선교사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 원주민 학생들에게 [[강간]]을 저지르는 등 횡포가 심했다. 그래서 이 지역 원주민들은 백인 선교사들을 혐오한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임에도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