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선양시 (문단 편집) == 상세 == 이 지명은 시 주변을 흐르는 훈허 강(渾河)의 옛 이름 선수이 강(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양(瀋水之[[양#s-9|陽]])'에서 유래한 것이다. [[발해]]가 심주라는 이름을 쓴게 최초로 이 지역 지명에 '심'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며, 이후 심주, 심양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원나라 시기 [[고려]] 국왕이 겸임으로 봉작되었던 [[심왕]]위의 '심'이 이 지역이다. 과거에는 [[고조선]]의 수도 [[장당경]]이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조선-연 전쟁]] 이후 중국 [[요동군]] 후성현(候城縣)이 되었다가 시간이 흘러 [[고구려]] 영토가 되었고 개모성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로는 [[당나라]]가 이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이후 [[발해]]가 이곳을 차지하여 심수(혼하)의 이름을 딴 심주(瀋州)를 설치하였다. 발해 이후로 줄곧 심주(瀋州), 심주(瀋陽) 등으로 불리며 현재의 선양(瀋陽)에 이른다. 이후 [[명나라]] 대까지 선양으로 불리다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후금]]이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때 '묵던'(ᠮᡠᡴ᠋ᡩᡝ᠋ᠨ, Mukden)[* 194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로 이 도시를 나타낼 때는 Mukden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다.]이란 [[만주어]]로 도시 이름을 고쳤다. 묵던은 중국식으로는 성경(盛京)으로 불렸다. 이때 세운 궁전이 [[선양고궁]]인데, 영어명이 '묵던 팰리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와 [[소현세자]]가 끌려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1644년 청군이 [[베이징시|베이징]]에 입성한 후 수도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성경은 1657년 다시 봉천부(奉天府)로 개명하며 사실상 만주족의 고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만주]] 일대를 신성시하는 청국 조정의 방침에 따라 한족의 출입이 엄금되었으나, 이후 열강들이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땅을 뺏기게 된 청나라가 [[틈관동|급하게 출입금지를 해제하여 사람들을 만주에 살도록 하자마자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봉천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1900년 전후로 [[간도]]와 [[만주]]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대한제국]]이 봉천 일대에 군대를 보내 만주 지역의 청군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북방 지역의 대한제국군은 도적 토벌, [[의화단]] 잔당 토벌, 국경 분쟁 등으로 실전에 잔뼈가 굵은 강군이었다. 이러한 군사를 대한제국이 무려 15,000명이나 만주에 증파하고 간도지역의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자 [[청나라]]는 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에는 [[장쭤린]]-[[장쉐량]]으로 이어지는 [[봉천군벌]]의 근거지가 되었다. 1929년 6월 3일, [[국민당의 2차 북벌]]이 행해지고 [[북양정부]]의 수도 베이징이 위협당하자 장쭤린은 펑톈을 [[북양정부]]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여 며칠 동안 중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황고둔 사건|장쭤린이 6월 4일 열차 폭파로 비명에 가고]] [[동북역치]]가 일어나면서 무의미해 졌다. 참고로 당시 이 도시의 이름인 선양-펑톈의 지명은 [[알자스-로렌]]처럼 정치적 떡밥과 맞물려 개명이 반복되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국에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기존에 있던 청나라의 봉천부(奉天府)는 봉천현(奉天縣)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13년 4월 상위 행정구역인 [[봉천성]]과 명칭이 같다는 이유로 봉천현은 승덕현(承德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한 달 뒤인 5월에는 선양현(瀋陽縣)으로 재차 변경되었다.[[https://aocs.inu.ac.kr/webzine/app/view.php?wp=124|#]] 이어 봉천성 남로도(南路道)에 속하게 되었다. 1923년 5월 3일 봉천시정공소주비처(奉天市政公所籌備處)가 성립되어 같은 해 8월 봉천시정공소가 정식으로 성립되고, 선양현은 봉천시(奉天市)가 되었다. 정식으로 수립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1929년 2월 5일 봉천성의 명칭을 [[랴오닝성]]으로 개칭하였으며, '봉천시'라는 명칭도 같은 해 4월 2일 선양시(瀋陽市)로 개칭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다시 봉천시로 개칭되었다.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만주족에게 역사적 상징성이 높았던 선양을 수도로 삼고 만주국 건국을 선포하고자 했으나, 일본 측은 푸이의 뜻과 달리 선양 북쪽의 [[창춘시]]를 수도로 삼았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이 끝나자 다시 '선양시'라는 명칭을 회복했다. 선양과 그 주변도시는 [[평안도]]/[[경상도]]계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시타(西塔)란 곳에는 [[한국인]]가게, [[북한]](조선)식당(평양관-모란관) 등 간판이 한글로 표기된 상가가 가득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2016년 이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으로 이른 바 [[한한령]]이 단행된 뒤 기존에 4~5만 명에 육박했던 한국인들이 빠져나가면서, 한인상가도 많이 쇠퇴했다. 그마저 남아 있던 곳들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거의 사라져 한국인 상권이 사실상 붕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