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제후 (문단 편집) === 선제후의 전성기 === 동프랑크 왕국 말기, 독일 왕국 성립기에 시작된 황제 선출 전통은 이후 기존 부족 공작들과 함께 오토 1세의 제국교회 정책으로 성장한 수좌주교[*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세 교구 주교들. 이들은 일찍이 [[로마 제국]] 시대부터 교구가 설정되어서 독일 지역의 다른 주교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 등을 포함한 선거인단이 황제([[독일왕]])를 선출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의 선제후 명단은 명확하지 않은데, 1152년 기록에 의하면 교회의 대표들과 프랑켄, 슈바벤, 작센, 바이에른 네 명의 공작들이 언급된다.] 그러다가 12세기 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 시절에 선제후 제도는 큰 변화가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그 중에서도 특히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행사했던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시절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위 세습은 큰 위협에 처해 있었다. 바이에른와 작센을 전부 손에 넣으며 [[호엔슈타우펜 가문]]보다 더욱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벨프 가문]]의 존재 때문이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즉위 후 거의 평생을 라이벌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과 다툼을 벌였고 결국 승리해 그의 영지를 잘게 쪼개어[* 대표적으로 [[작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작센의 중심지가 [[니더작센]]에서 [[작센안할트]]를 거쳐 현재의 작센주로 옮겨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5대 [[부족 공국]] 체제를 사실상 해체하였다.(1180년~1190년) 강력한 황권을 휘두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몰락했으며, 그의 생전에 슈바벤 공국은 사실상 해체되어 이름만 남은 껍데기로 전락했다, 이후 1356년 [[금인칙서]]가 반포될 때까지 선제후 자리는 고정되지 못하고 유력 제후들이 돌아가면서 차지했다. 선제후 자리를 놓고 제후들 간의 다툼도 자주 발생했다. 선제후는 세습화한 왕조의 후계자를 공인해주는 거수기 역할을 할 때가 많았지만, 왕조가 단절되었으나 황권이 약화되고 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막강한 실권을 발휘하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선제후가 그러한 실권을 실질적으로 발휘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황권 강화를 위해 선제후들을 조져놓았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사망한 직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때까지 약 250년간의 적지않은 기간 동안이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황권 강화와 가문의 안정적인 제위 세습을 위해 선제후를 독점하였던 5대 공국을 해체했지만, 그가 죽자 거수기였던 선제후들이 오히려 진정한 실권을 발휘하며 바르바로사의 후손들을 몰락시켰다. 바르바로사 사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즉위하여 강력한 황권을 이어가려 했으나 1198년, 이른 나이에 죽자 제후들을 찍어 누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 반감을 가진 제후들과 교황이 결탁하여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이자 차기 황제([[독일왕]])로 이미 선출된 [[프리드리히 2세]]를 거부하고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동안 독일 역사에서 가문이 단절된 경우가 아니라 왕조의 후계자가 있는데도 선제후들이 실권을 발휘해서 왕조를 갈아치운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이로 인해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문서에서는 1198년부터 실질적으로 우리가 아는 선제후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안정적으로 세습하게 되는 1452년까지 약 250년간 선제후들은 황제 선거에서 실력을 행사했고, 황제들과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13세기에는 당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의 입김도 선제후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대 교황 중 최절정의 위세를 과시한 [[인노첸시오 3세]]는 선제후 중 3명의 성직 선제후에 더해 세속 선제후 중 라인 궁정백을 포섭하여 황제 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던 [[호엔슈타우펜 왕조]][* 북이탈리아는 호엔슈타우펜 치하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남이탈리아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적 지배와는 별도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이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를 차지하던 [[교황령]]은 남북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포위를 당하던 상황이어서 [[교황]]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았다.]을 견제하기 위해 1198년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일시 단절시키고 [[벨프 가문]]의 [[오토 4세]]가 제위를 차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막상 [[오토 4세]]가 제위에 올라 자기 권력을 강화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황제를 압박하여 결국 제위에서 자진해서 물러나도록 하기까지 했다. [[독일왕]]이 아닌 대관을 받은 황제 중에서 교황의 압력으로 퇴위한 것은 오토 4세가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오토 4세 퇴위 후 인노첸시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배후 지원하여 그를 황제에 앉혔지만, 프리드리히 2세도 교황과 갈등을 벌였고, 이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3번이나 파문을 날렸다. 이런 과정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크게 힘을 잃었지만, 교황 역시 독일 제후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제국은 후계자를 두고 혼란에 빠졌고 30여 년 간의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었다. 결국 교황과 제후들은 혼란을 종식시키 위해 다시 정통성 있는 황제를 뽑아야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1273년 대공위 시대를 종식하기 위한 황제 선거가 열렸다. 제후들의 반감으로 교황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제후들은 혼란을 방지하고자 황제를 뽑되, 특정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며 강성해지는 것을 막고자 일부러 한미한 백작 가문을 황제로 선출한 후 왕조를 계속 교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하여 스위스 산골짜기에 있는 합스부르크 백작인 루돌프 4세를 새로운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하였다. 당시 어수선한 상황과 교황 및 막강한 공작, [[프랑스 국왕]] 등의 견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루돌프 1세는 교황의 대관을 받지 못했다. 이후 [[하인리히 7세]]를 제외하면 한동안 이처럼 대관을 받지 못하고 제위를 이어가는 시대가 지속되었다. 루돌프 1세는 죽기 전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알브레히트]]에게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물려주고 미리 후계자로 선출시키기를 원했으나 제후들은 당연히 거부하였고, 이후 나사우 백작 [[아돌프(신성 로마 제국)|아돌프]], 루돌프 1세의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 나사우 백작 아돌프를 꺾고 기어이 독일왕으로 즉위하기는 했으나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했다.], [[룩셈부르크 가문]],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등이 돌아가면서 제위에 올랐고 어떤 가문도 3대 이상 장기적인 세습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각 가문은 후손들에게 제위를 세습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점차 세습 주기가 길어졌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제위 세습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가문이었다.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s-2.8]]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카를 4세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룩셈부르크 가문은 카를 4세의 차남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기스문트가 가진 독일 왕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헝가리]]-[[크로아트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을 상속받은 사람은 지기스문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알브레히트 5세]]였다. 그러다가 1452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왕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로 선출된 후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 세습하기 시작했다. 재주는 카를 4세가 부리고 돈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져간 셈.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도 초기에는 세습을 이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잉여인간|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나]] 워낙 장수한 덕에 경쟁자들이 죄다 먼저 죽어[* 친척인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유복자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친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알브레히트 6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첼레 백국|칠리 백작]] 울리히,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 등] 아들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에게 제위를 세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는 황제 선거에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한 경쟁 끝에 황제로 선출되었다. 게다가 카를 5세도 아들을 황제로 선출시키는데 실패했다. 사실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이 황제로 선출되기를 원했지만, [[스페인인|스페인 출신]]에 대한 제후들의 거부감 탓에 아들이 선출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1553년 자진해서 아들을 황제 후보자로 출마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펠리페 2세가 제위를 물려받는데는 실패했지만,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이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