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조선) (문단 편집) == [[선조(조선)/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선조(조선)/평가)] [[임진왜란]]에서 보인 처참한 행적 덕분에 대중적으로 큰 증오를 받는 왕이다. 사실 임란 때의 실책만으로 욕을 먹는 것은 아니고, 다른 때에도 비난받을 일을 많이 일삼은 폐급 군주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 (註 018) 정공 도감(正供都監) :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직.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정공 도감을 두었는데 이는 이준경(李浚慶) 등이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감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조정 선비로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낭관에 충차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 보신적인 행태로[*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 3년 11월 1일)]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때 드러난 [[조선|국가]] [[지도자]]로서의 결격 사유 때문에 전반적인 여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까 '''파천'''으로 대표되는 무책임한 면모와 '''[[이순신]] 해임''' 등 전시의 무능 때문에 대중적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상당히 뛰어났으며 실제로 그 인재들은 [[이순신]] 외에도 다방면에서 많은 공로를 남겼다.[* 유교 사회에서 멸시받았던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허준]] 같은 인물을 지원해서 《[[동의보감]](東醫寶鑑)》[*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서)]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 죄인 허준(許浚)의 죄악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배된 후에도 기탄없이 방자하여 태연스럽게 출입하기를 평인과 다름없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잠상인(潛商人)들과 내통하며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본래 흉악 패려한 사람으로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리 안치를 명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허준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방자하게 원망을 품는 일이 있겠는가.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광해 1년 4월 21일)][* 전교하였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광해 1년 11월 22일)] 작성되고 완성되어[*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인데, 대개 중조(中朝)의 고금 방서를 널리 모아서 한 권에 모은 다음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광해 2년 8월 6일)] 간행되었기에[* 내의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하삼도(下三道)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頉報)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監修)하고 교열(校閱)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물력(物力)이 곤란하기는 하나, 한 달에 들어가는 요미(料米)와 가포(價布)를 계산해 보면 미(米)·태(太)가 아울러 18석이고 무명이 20여 필인데 그 공정이 1년의 공사에 불과하므로 통계가 크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사로 하여금 혼자 마련하게 한다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삼도가 앞서 재료를 마련해 놓았으니, 들어갈 무명을 헤아려서 각각 수송하여 경국(京局)을 돕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계획이 제일 낫습니다.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3년 11월 21일)]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 중 하나로 간주된다.]의 편찬을 명했다.][* 그리고 [[이원익]]과 같이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의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 탐색했으며 [[이원익]]은 결국 광해군[* 당해 5월에 설치된 선혜청은 광해군의 이 비망기로부터 직접적인 설립 배경을 찾을 수 있다....기사의 밑줄 친 부분에서처럼 각 읍의 해묵은 포흠과 긴급하지 않은 공물 등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서 하나의 국을 별도로 설치하는 방안은 이원익의 차자에서 나온 것이나, 그 논의의 발단이 된 것은 광해군의 비망기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8-9)] 즉위 직후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 선혜청은 공물을 作米하던 관행을 공식화하여 운영함으로써 외방에서 그때그때 차출해 쓰던 현물과 노동력이 서서히 대동세 안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이처럼 경기선혜법은 17세기 전반 당면한 재정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으며, 경기선혜법을 시행을 통해 정해진 원칙, 즉 공물을 일관된 기준의 대동세로 거두고, 민역 동원을 給價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이후 중앙의 재정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29)]인 [[대동법/광해군 시기|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의 초안을 올림으로써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군사와 첩보에서도 많은 인재들을 긁어모아서 후대인 [[광해군]]과 [[인조]] 때까지도 그나마 쓸만한 실무자들은 선조가 직접 발탁해둔 케이스일 정도로 인재의 등용과 배치에 있어서 유능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을 '''[[중령]]급에서 [[중장]]급으로 파격적인 인사이동'''을 시킨 인물이다. --물론 원균이 말아먹고 복귀시켰을때 소장급으로 원복시킨 찌질한 면도 있다.-- [[권율]] 또한 선조의 파격적인 발탁이 있었기에 활약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야 본래 패기있는 젊은 무관이었다 쳐도, 40이 넘어 문과에 급제한 양반 자제를 무관으로 돌려 끝에는 도원수로 임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에서도 안 나올 기막힐 이야기다. 그러나 선조는 이걸 그대로 실행했고, 권율은 선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나마 선조 집권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초기 이후로 여러가지 국가 체제의 모순이 쌓여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 [[대동법]]의 프로토 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이이(조선)|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는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매우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졌다. 문제는 진행 과정에서도 당대에는 지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며 즉위 후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내내 제자리걸음만 걸었다는 것이다.[*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는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도|충청]][[전라도|전라]] 연해지역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도|충청]][[전라도|전라]] 연해지역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광해 9년 3월 8일)]을 참고하라][*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 성종 본받겠답시고 《[[동문선]](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동문선#s-1.2|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3616373|중종대(中宗代) 속찬증보(續撰增補) 사업과 그 정치적 함의]]]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동법#s-3.1|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 27년 11월 16일)]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일각에서는 "선조는 성리학 카르텔의 수장이었으므로 좋은 기록을 받았다"거나 "전시 대비에 무능하고 게을렀다"는 식으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선조 옹호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오히려 선조는 대의명분이나 유교적인 절차를 허례허식 따위로 치부하며 제멋대로 정치를 했다. 이러한 성향이 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냈더라면 파격적이고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선조의 방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전란 전에는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같은 그리고 전란 후에는 [[칠천량 해전]] 같은 가히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 흔히 혼동되는 것과 달리 [[지능]]과 [[지혜]]는 정비례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진왜란 중에 보인 해괴하고 황당한 파천 계획만 보더라도 선조는 대의명분보다 일신의 이득만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같은 행태는 국가적인 위기 중에도 사회 전반의 안녕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손익 계산에 혈안인 현대의 정치인에 가깝지 전제군주제 시대의 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쟁 중의 선조의 평가는 군주로서 결격 수준이며 가히 최악이다. 선조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쉬지 않고 북으로 몽진했고 [[의주]]에 이르르자 아예 [[명나라|타국]]으로 도주하면서 [[광해군|어린 아들]]에게 선위할 것처럼 분위기를 짜 놓았다. 여차하면 '''자기 국가를 버리고''' [[요동]]에서 새로운 정권을 만든 후 전란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통치하겠다는, 왕으로서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죄악인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실행에까지 옮겼다가 이 따위 작자를 왕으로 모셨던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함께 심지어 적국인 왜까지 삼국 모두를 당혹시켰다. 이렇듯 선조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일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실로 평범한 백성보다도 못한 행동거지였다. 선조가 [[암군]]으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이 탓이다. 덤으로 명신들과 명장들이 세력을 키운다 싶으면 여지없이 [[숙청]]해 버렸으며 전쟁이 끝나자 돌아와서 실권을 잡은 후에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선위쇼 같은 얕은 술수 따위나 쓰면서 지대추구를 꾀했을 정도로 간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선조가 분명 머리 좋고 인재를 보는 눈이 좀 있었다는 것까지는 주류 사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점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선조는 지능만 좀 높았을 뿐, 그 지능을 국가와 민족에 이롭게 사용할 지혜는 전혀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오히려 그 좋은 머리를 자기 잇속 챙기는 데만 사용할 줄 알았지, 국가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다스리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한낱 장사치에나 어울리지, 한 국가를 다스릴 그릇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사회의 한계로 인해 왕손이라는 이유로 왕 자리를 차치해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총평하면 일부 인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 됨됨이가 졸렬하고 천박한데다 기본적인 도덕관념조차 결여되었고 무엇보다도 최고위 정책결정권자로서 정작 진짜 필요한 정책적 혜안이 탁월한 것도 아니라서[* 업적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조선정부가 작은정부인지 그조차도 자각을 못하고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의 가난만을 한탄하는 그 유명한 망언[*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조 38년 9월 28일)]을 보면 도첩제 존폐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연산군만도[*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국가가 백성에게 중이 되는 것을 금하여, 그 도첩(度牒)이 없는 자는 모든 고을로 하여금 조사해 내서 공역(公役)에 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이 되는 것은 어찌 산간의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겨서이랴. 오로지 국가가 인정(人丁)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색하여 비록 한 집안에 서너명의 인정(人丁)이 있더라도 다 군적(軍籍)에 기록하므로 집안에는 남은 장정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생계의 이익이 적으므로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여름철에 더웁거나 비가 많이 와도 소민(小民)은 원망하고, 겨울철에 추워도 소민은 역시 원망하는 법이니, 백성을 다루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점을 미루어 평이한 길을 찾아내야 백성이 편안하다.하였으니, 지금 백성으로 하여금 남은 장정을 가지고서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어 주자면 어떤 길이 있겠는가?" 하매, (연산 2년 1월 3일)] 머리가 안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책적 성과를 내는 능력은 하다못해 중종 명종 둘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고 출범후 아무런 일도 제대로 못한 정공도감(正供都監)을 스스로 날린 것을 보면 이정청(釐整廳) 설치 그리고 이정절목(釐整節目) 도출 적어도 여기까지는 성공한 철종만도 한참 못하다. 앞서 언급한 왕들이 전혀 명군 축에 못든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능이고 자시고 간에 그냥 사람 자체가 무슨 저주라도 걸린양 무능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일국을 다스려야 할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신과 권력욕 충족 외에는 별다른 성실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거시적 비전도[* 그나마 왜란 종결 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를 내세워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 등을 행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발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부계획에 있어서 이후 현종 대에 숙종 대에 절수(折受) 제도, 입안(立案) 제도 규제강화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거나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거나 하는 대안을 선조 대에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에 실시된 [[대동법/광해군 시기|대동법]] 같이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실시한 적은 선조 대에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이것을 원칙으로 간주하겠다고 승인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선조라는 왕이 집권한 동안에는 무엇인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개선책이 실시되고 성과를 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란 전에는 원칙이 없었고 전란 후에는 그나마 여민휴식(與民休息) 같은 그것 자체로는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세부계획이 뻔해서 민간의 자생능력에 대부분 의지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원칙도 없는[*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방만한 국정 운영으로 제대로 된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오히려 명군이라는 괴평가가 나오기도 하는 전란 전의 집권기가 더 그러한 경향이 있다.] 심지어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오로지 자신 한 몸의 안위만을 위해 국가와 백성들을 포기해 버리는 추태를 보여 민심을 잃고 왕권에 먹칠까지 하는 등, 선조의 인간적인 하자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선조가 임란 동안 저질러 댔던 얼빠진 짓거리들을 보며 질린 나머지 나중에는 대놓고 왕의 면전에다 필부[* 匹夫; 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 남자.]라는 멸칭을 사용했으랴. 전근대 사회에서 왕에게 대놓고 이런 멸칭이 공공연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의 권위에 심각하게 금이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대에 와서도 딱 그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선조 옹호론자들은 끈질기게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만 이어졌다면 명군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만약이고 자시고 간에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25년이라는 기나긴 집권 기간도 반영되어 내려진 것이다. 애초에 이상의 선조 관련 평가는 어디 어중이떠중이 재야학자들도 아닌 주류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내려 왔던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조가 명군감이라는 괴상한 미화가 나오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정작 그 임란 전 25년 동안에도 국가의 발전에 선조가 제대로 기여한 것이 있었는지, 내세울 만한 업적이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선조(조선)/평가#s-3.7|선조(조선)/평가]]] 설상가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결여되고 이기주의적인 지도자들이 대개 그렇듯, 자기가 그나마 지니고 있던 몇 안 되는 장점조차 자식들에게 제대로 계승해 주지 못했다. 선조는 조선 왕조 역사를 통틀어 자식농사까지 최악으로 지어 후대에 민폐를 무진장 끼친 것으로 유명한데, 왕자들이 하나같이 개차반이 된 이유도 남탓할 것 없이 결국 선조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다.[* [[임해군]]과 [[순화군]]만 보더라도 자식을 계도하고 꾸짖기는커녕 무턱대고 감싸고 돌기만 해 결국 [[강간]]과 [[살인]]을 밥 먹듯 저지르는 싸이코들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세자|정식 후계자]]이자 그나마 왕자 노릇은 하고 있던 [[광해군]]을 자기 자식이면서도 시기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면서 후계 구도를 어그러트릴 뻔하는 등 후계를 굳건히 해야 하는 유교 사회에서의 임금이 해야 할 역할을 대놓고 방기하였다. 이 정도면 의도적으로 조선 종묘에 분탕을 치기 위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인가 싶을 지경이다.] 이처럼 인간으로서는 됨됨이가 저열했고 국가지도자로서도 성과가 형편없었으니, [[악인#s-1|악인]]인 주제에 [[암군]]이기까지 하다는 박한 평가를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