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조선) (문단 편집) === 하성군 시절 === 1552년 11월 11일에 한성의 인달방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3남으로 태어난다. 하동군부대부인은 집현전의 학사로 일하다가 세조 치세에 영의정으로 등극한 [[정인지]]의 증손녀이고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로 하성군은 중종의 서손자이다. 선조의 본명은 이균으로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하동군]]에서 이름을 따와 하성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성군이 태어난 [[잠저]],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이 어린 시절에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인데 터가 안 좋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끝나가던 즈음에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을 바꿔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우물이 아주 잘 나오는데 별 말을 다한다며 무시하고 집을 마저 지었다. 나쁜 터인 줄 알았더니 미래의 왕이 태어난 것이다.[* 덕흥대원군의 저택 공사에 당시 중종실록의 기사에서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덕흥 대원군 뿐만 아니라 당시 중종 서왕자들의 저택 공사가 폐단이 많아 대간들이 상소로 여러 번 지적할 정도였다.] 덕흥대원군은 하성군이 8살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하성군은 숙부인 명종의 지시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명종은 사망한 덕흥대원군을 대신하여 조카들에게 많은 정을 주었는데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자주 궁궐로 불렀는데 특히 하성군을 총애하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명종은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궁궐로 불러서는 익선관을 벗고 조카들에게 써보라고 말한다. 하원군과 하릉군은 명종의 말대로 써보았는데 하성군만 극구 사양하였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하였다. 감동한 명종은 하성군에게 "이 관은 네 것이니라."고 대답하였다.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의심받기도 하나 일단 이 일화는 광해군일기의 선조 행장[[https://sillok.history.go.kr/id/koa_10002021_012|#]]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일화가 기록된 광해군 일기의 선조 행장은 선조 이후의 기록이라 선조 아들인 광해군과 그 신하들을 비롯한 선조 진영에서 서술된 기록물이기에 선조의 겸손과 능력을 과대 포장하려 주관적인 의도로 서술되어 객관성이 떨어질수밖에 없고 명종실록에도 이 일화가 수록되지 않은 정황을 고려하면 선조측의 주관적인 과장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1565년 9월 15일에 명종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신하들은 후계자 지명을 서둘렀다. 의식이 없어서 대화가 불가한 명종 앞에 신하들이 모여들었고 영의정인 이준경이 말을 꺼내는데 명종은 의식이 없어서 당연히 대답이 없었다. 2일이 지난 17일에도 명종이 일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와 후계자 문제를 논의한다. 인순왕후는 평소에 명종이 총애하던 하성군에게 간호를 맡긴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세자의 업무이기에 하성군의 간호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은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는 수면 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자로 논한 신하들을 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에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택하는 것은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처벌이 내려지는 중범죄이다. 이준경의 건의를 책망하지 않고 넘어간 점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인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을 감안하면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히지만 명종이 진심으로 하성군을 후계자로 인정하였는데 공개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인지 하성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만 아직 자신의 나이가 많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서 중전에게 아들을 얻으면 세자로 지명하고 실패하면 하성군에게 물려주자는 차선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에 병이 깊어진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명종실록에 없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온 것이다. 후대의 추정으로는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짓는 행위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만 동의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사실을 후손들은 알지만 당시에는 모르는 일이다. 하성군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명종이 아들을 낳으면 후계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지는데 당시 명종은 30대이므로 자식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30대는 현대의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후계자를 얻어야 하는 왕임을 감안하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년 후인 1567년 6월 28일에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내정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덕흥대원군의 삼남인 하성군으로 결정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을축년의 일은 하성군이 명종을 간호한 일을 의미한다. 인순왕후도 당시의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도 인순왕후의 선언을 수용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성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이미 고인이고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도 하성군이 즉위하기 1달 전에 사망한다. 게다가 하동부대부인의 친정 역시 권세가 큰 가문이 아니고 아직 하성군도 혼인하지 않은 몸이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척신들이 발호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적었다. 그리고 하성군은 복성군의 형식적인 양자이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과 명종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의 양자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복성군의 아내도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땅한 선택지도 없었다. 중종의 손자 중에서 적자는 덕흥대원군이 낳은 3형제와 덕양군의 아들인 풍산군이 전부이다. 가장 많은 아들을 둔 해안군은 적자가 없고 서자만 두는 바람에 덕흥대원군은 하원군만 남겨두고 하릉군과 하성군을 이복형들의 양자로 보냈다. 이걸로도 모자라 금원군 슬하의 왕자인 영양군과 봉성군은 3촌 조카가 아닌 5촌 종질들 중에서 양자를 들였다.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고 풍산군은 덕양군의 장남이므로 양자로 데려올 수 없으므로 남은 후보군은 하릉군과 하성군이고 심지어 하릉군은 이 당시에 작위조차 하릉군이 아니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ma_12108026_004|#]] 하성군을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의 막내아들로만 인식하면 하성군이 엄청난 방법을 통해서 범접하지 못하는 자리에 올라온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적었고 조선의 종법을 감안하면 하성군에게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로 즉위하기에 차라리 어린 후계자를 옹립해서 성년이 되기 전까지 군주의 역량을 기르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으니 선호되는 측면도 있었다. 세자로 책봉된 막내아들인 [[의안대군(이방석)|의안대군]]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도 하성군과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왕으로 즉위하여 선조가 된다. 즉위가 끝나고 선조의 즉위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이준경이 이미 대행대왕[* 사망한 후 아직 묘호를 올리지 않은 전대의 왕을 대행왕이라고 부른다. 즉 여기서는 명종.]께서 정한 일인데 무슨 공이냐고 반문하면서 투서를 모두 모아서 불태웠다. 동시에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된다. 선조의 치세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70년을 방치되었다가 고종의 치세에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각계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한다. 정작 고종 본인이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켰음을 선포한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선조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서자 출신의 방계 인사로 적자가 낳은 대군이 아니다. 그동안 장남은 아니어도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가 후계자로 올랐다. 성종은 삼촌인 예종보다 먼저 후계자로 지명된 의경세자의 아들이라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오른 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삼촌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3살이라 너무 어려서 왕위는 성종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적통 문제를 따지면 성종에게 위험이 될 소지가 있어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인수대비]]를 [[안순왕후]]보다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계유정난]]과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세조와 중종도 과거 대군이었다. 적장자 출신인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전부고 그마저도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한 기간이 10년 미만이다. 물론 선조도 서자는 아니고 엄연히 덕흥대원군의 적자이니 서자 출신인 왕은 영조가 최초이다. 잠시 왕비에 올랐다가 후궁으로 격하된 희빈 장씨를 숙종의 첩으로 간주한다면 경종이 최초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