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조선) (문단 편집) === [[종계변무]]와 [[기축옥사]] === 1588년 [[명나라]] 측에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를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록을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과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정말 나빴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유야무야 흘리듯 넘겨 버렸었다.] [[사대주의|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성리학]] 유학계의 너무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 명나라 기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권력]]을 휘어잡은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걸 무려 200여 년 뒤에야 [[환조(조선)|이자춘]]의 아들이라고 바로잡은 일이다. 그러므로 이를 왕실의 종(宗)사와 계(系)통에 대한 무(誣)함을 변(辨)호했다는 의미로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선조 사후, [[광해군]]은 종계변무를 명분 삼아 부왕의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로 지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선조의 신위는 5대가 지나더라도 [[종묘|종묘 정전]]에 자리를 영원히 보존하는 '''세실(世室)'''이 되었다. 사실 즉위 기간이 짧거나 반정으로 쫓겨난 왕이 아닌 이상, 조선조 임금의 웬만한 신위는 거의 다 세실로 지정되어 있긴 하다.]라고 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붕당|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서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이 악용된 것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조선)|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할 [[권신]]이나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망칠 [[간신]]으로 생각하여 죽이거나 쫓아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며 친국을 자주 실시하며 옥사를 즐기는 등의 가학적이고 잔악한 모습을 보이며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 증폭시킨 공안 사건이었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이러한 방식은 생산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권 그 자체의 획득이 목적인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은 본인이 권신이나 간신이 아니며 차라리 조정에서 들어와 관리를 생활한 다음 감옥에 가두는 것이 낫다고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조선)|효종]]과 [[숙종(조선)|숙종]] 때 반대파 [[서인]] 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 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까지도 있는 호남 혐오에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옥사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수백명 가량으로 가히 조선 역사상 최대규모의 옥사라 할만했으며 정확히 백명이 죽었던 그 악명 높은 갑자사화의 몇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옥사가 일어나던 처음에는 상이 수십일 간을 친국(親鞫)하였고 그후에는 혹 정국(廷鞫)하면서 대신이 아울러 참여하였으며, 최후에는 삼성 교좌(三省交坐)로 추국하면서 한 대신이 감국(監鞫)하였다. 경인년039)(註 039)(경인년 : 1590 선조 23년.) 5월 이전에는 정철(鄭澈)이 감국하였고 그 후에는 유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元) 등이 대신하였다. 이 해에는 이발 형제 외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기축년040)(註 040)(기축년 : 1589 선조 22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 【이발·이길·백유양(白惟讓)·유덕수(柳德粹)·조대중(曺大中)·유몽정(柳夢井)·김빙(金憑)은 장(杖)형으로 죽었고, 윤기신(尹起莘)·정개청(鄭介淸)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길에서 죽었으며, 최영경(崔永慶)은 옥사하였다.】 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몇백 명이었는데 조신 가운데 귀양간 자로는 정언신(鄭彦信)·김우옹(金宇顒)·홍종록(洪宗祿) 등이었으며, 파출(罷黜)된 자도 수십 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옥사가 일어난 초기에 결정된 자들이다. (선조수정 선조 24년 5월 1일)]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건저 문제)과 관련해 [[류성룡]]과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가 정철만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자신이 조정에서 관리로 추천받지 않으면서 권간이라는 이유로 옥사 당시에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조선)|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