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조선) (문단 편집) ===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 ===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족]])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의 대표적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함경북도]] [[경원군|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尼湯介)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은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개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국경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납치해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기습적으로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수급(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이 [[녹둔도 전투|녹둔도 침공]]에 대한 당시 선조의 대응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방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에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은[*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진왜란|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군|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선조 31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선조 32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선조 33년) 4월 14일에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백의종군]] 했다. [[효종(조선)|효종]]의 북벌을 상징하는 무인 [[이완(1602)|이완]]의 부친. ]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군|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시|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군|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야산)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쌍그리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壯快)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투항하고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년)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년) 3월에는 [[종성군|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종성군|동관진]]을 약탈한 여진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후금]]의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藩胡)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