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통제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과 사망 === [[파일:person_puyi36.jpg]] 1960년대의 푸이.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다. 하지만 푸이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할 무렵에 중국 전역이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싸이며 혼란에 휩싸였었고, 푸이 본인도 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목격해야했다. 그가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 그를 반동이라고 하면서 계속 핍박하던 교도소장이 나중에 풀려난 푸이 앞에서 [[홍위병]]한테 끌려가서 [[반동분자]], [[수정주의]]자라며 린치를 당할 정도였다.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교도소장이 푸이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새 삶을 찾기를 바라며, 푸이를 무조건적으로 몰아붙이는 다른 교원들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좋은 인물로 나오며 푸이도 홍위병 앞에서 그를 진심으로 변호한다. 홍위병들이 교도소장을 고발하는 죄목은 제국주의자, 반동분자, 배신자인데 이는 사실 푸이가 과거 고발당한 죄목이다. 푸이를 옹호하는 교도소장의 성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 실제 푸이를 교화한 조선족 김원은 이 시절 숙청되었다가 1990년에 한국으로 귀국했는데, 그는 푸이에 대해 "순박한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동정하지만, 그가 저지른 역사적인 죄과는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푸이의 집에 웬 여자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는 네놈이 만주국 허수아비 황제 시절에 [[궁녀]]였는데, 그때 너에게 [[강간]] 당했다!" 하면서 보상하라고 날뛰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홍위병]] 표식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그걸 본 '''진짜''' 홍위병이 오더니만 욕을 퍼부으면서 끌고가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패 죽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가짜 홍위병도 판쳤기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대놓고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진짜 홍위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홍위병이라는 게 정부에서 정식 인가받은 조직도 아니고 그냥 붉은기 들고 붉은 [[완장]] 찬 무리 혹은 개인들이 스스로 칭하고 다니던 거라 진짜, 가짜 따지는 것에 의미는 없었다. 나중에 다른 여자들이 찾아와 만주국 궁녀였다며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보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여자들이 몰려와서 우리도 만주국 궁녀였다며 난리를 부렸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푸이는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 와중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제대로 치료도 못 받을 뻔하다가[* 고위급 인사였기 때문에 돈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고귀한 신분이 문제였다. 푸이가 홍위병들이 싫어하는 청나라와 만주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홍위병들에게 공격받을까 두려워 병원들이 입원을 거부한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푸이를 홍위병들의 폭력이 심하지 않은 [[베이징]]의 병원에 입원시켰다.] [[저우언라이]] 수상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치료시기를 놓쳤던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제대로 된 [[유언]]도 못 남기고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그나마 병상에 있었을 때는 저우언라이 수상의 배려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나름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단순히 홍위병 폭력이나 푸이의 과거 신분, 문혁으로 인한 의료체계의 붕괴 이런 걸 다 차치해서 사회주의 국가 의료인들은 자본주의 국가 의료인들과 달리 일단 엘리트란 인식 자체가 별로 없고(한때 북한에선 대놓고 여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돈벌이나 하려고 하는 일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현재는 북한이 워낙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의사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고 인기도 많아졌지만 친절 서비스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 딱히 자본주의 병원처럼 환자 유치를 하기 위한 서비스 정신을 보일 필요도 없기 때문에 환자 대접이 꽤 박한 걸로 유명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중국으로 여행을 간 사람들 수기를 보면 병원에서 얼마나 환자를 험하게 다루는지 기겁했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중국내에서도 이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아서 그나마 서비스가 좋은 대형병원으로 몰려들어와 대형병원이 과부하 되는 것이 협소한 의료보장범위와 비교적 낮은 지방병원의 질과 더불어 문제점으로 지적될 정도였다.] 시신은 화장되어 베이징의 인민 납골당,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등을 전전하다가 [[1995년]] [[1월 26일]] 사후 28년 만에 청 왕조의 두 능구 중 [[허베이성]] 이셴(易縣)의 청서릉(清西陵)[*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의 푸이묘. 별칭은 헌릉(獻陵).]으로 이장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