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설경동 (문단 편집) == 생애 == [[1901년]] [[3월 19일]] [[평안북도]] [[철산군]] 정혜면 인송동(현 철산군 오봉리)에서 [[아버지]] 설흥업(薛興業, 1869. 4. 9 ~ 1919. 10. 2)과 [[어머니]] [[한양 조씨]] 조성녀(趙성녀, 1878. 8. 4 ~ 1933. 3. 7)[* 조성래(趙聖來)의 딸이다.]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한 시대를 이끈 사업가이기는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어린 시절이 좀 어둡다.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셨으며,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사해 [[학교|무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유학보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과감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쿠라 [[고등학교|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하고 중퇴했다. 결국 [[한국]]으로 귀국해 [[부령군|부령군청]]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본격적인 사업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업 수완이 뛰어난 듯하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그는 [[일본인]]을 동업자로 끌어들여 삼광운송점과 삼광상회를 세우며 운송업과 곡물, 해산물 위탁판매 를 해서 부를 축적했으며, 뒤이어 동해수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청진]] [[바다|앞바다]]에서 [[정어리]]를 잡아 이를 가공해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에 힘입어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고기를 탐지할 정도의 [[함경도]] 거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북한]]의 공산군이 점령하면서 [[월남]]해 무역회사인 대한산업과 [[부동산]] 회사인 원동흥업을 세워 [[대한민국|남한]]에서도 곧 거부 대열에 올라섰다. [[한국전쟁|6.25]]전까지 그가 [[수원시]]에 세운 성냥공장은 한국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전 [[재산]]을 모두 날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 방직공장을 인수하여 대한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장이 되었고, 귀속재산 조선전선을 불하받아 대한전선도 세웠으며 자유당 재정부장도 지냈다. 그러나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은 그에게 치명타를 입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장남]] 설원식이 [[구속(형사절차)|구속]]돼 실형을 살기도 하였다. 1960년에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장남 설원식에게 넘겨 분리시키고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대한전선의 시설확충에 입김을 불었다. 이후 [[텔레비전]], [[냉장고]], [[선풍기]] 등 전자제품 생산을 해 당시 가전제품 판매율 2위로 올랐으며,[* 당시 1위는 [[금성사]]. 현재 가전부문은 [[위니아전자]]가 되었다.] 이의 호황에 힘을 실어 그의 기업체군은 대한재벌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설원량]]에게 사업기반을 물려 주고 물러났다. [[1974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필동2가 자택에서 지병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4012100099201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4-01-21&officeId=00009&pageNo=1&printNo=2425&publishType=00020|별세했다]]. [[향년]] 72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