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설장수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는 백료손(伯遼遜)으로 본래 원나라 [[색목인]] 관료였다. 1359년[* 이 해 12월 고려는 1차 [[홍건적의 난]]을 겪었다.] 19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이주했다. 이후 [[원나라]] 볼모 시절 아버지와 친구였던 [[공민왕]]의 후원으로[* 공민왕은 설장수의 아버지 백료손과 친분이 깊어 백료손이 고려로 이주했을 때 땅과 집을 하사하며 부원군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1362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시작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등 밀직사와 문하부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경력을 쌓았다. 이후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 과정에서 재신(宰臣)인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태조(조선)|이성계]]와 함께 흥국사 9공신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고 유배되면서 정치 주류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태조가 반드시 구제해야 하는 인물로 [[이색(고려)|이색]], [[우현보]]와 함께 지명하면서 그 외 30여 명과 함께 유배에서 해제되고 명예직인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받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복귀 후에 실제로는 [[역관]] 담당 부서인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로 근무하다 1396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다시 재신이 되었다. [[설(성씨)|설씨]]의 글자 '설'은 가문이 대대로 설련하(偰輦河)[* 지금의 [[몽골]] 북서부와 [[러시아]] 부랴티야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흐르는 세렝게 강.]에 살았기 때문이고 관향은 조선 태조가 [[경주시|계림]]으로 정해줬다. 따라서 설장수의 부친 [[설손]]이 사성(賜姓) 경주 설(偰)씨의 시조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