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건축) (문단 편집) ==== [[중세]] 성기 및 후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Syjg6PHYFBo)]}}} || || 서유럽 축성의 발전 과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rdiff_castle.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odiam_castle.jpg|width=100%]]}}} || || 12세기의 전형적인 성 건축 양식인 카디프 성 || 14세기의 양식인 보디암 성 || 수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의 축성술을 알게 된 서유럽의 [[기사]]들의 체험은 12세기 말엽부터 본국의 축성술에 반영되었다. 12세기까지는 기존의 모트 앤 베일리에서 구조적으로 큰 발전은 없었다. [[해자]](Moat) 바로 안쪽의 장벽(Curtain wall)과 킵이 돌로 축조된 수준. 하지만 야만족의 침입이 잦아들어 상대적으로 평화로워지고, 인구가 늘고 법이 발전해 행정 역량이 증대되어 더 크고 정교한 건축이 가능해졌다. 대신 영주들 간의 내전이 상시화되어 공성 위주의 전투가 잦아지자, 단순히 구조물이 아닌 구조면에서도 12~14세기를 걸치며 급격한 발전을 한다. 성벽은 요소요소가 탑으로 강화되고, 그들 정상부에는 오목하면서 불록한 흉벽 또는 성가퀴가 설치되었다.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회랑식 주랑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마시쿨리라고 불리는 투석구가 마련되었다. 그러한 성벽에 싸인 [[성곽]] 속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건물은 킵이며 그것은 공방전에서 최후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원형과 다각형 킵의 예로는 프랑스의 세자르 · 에탐프 · 프로방, 영국의 코니스보로 등이 있다. 한편 지중해 동쪽에는 11∼12세기를 통하여 비잔틴의 전통이 계속되어 1099년 예루살렘 함락 후는 십자군에 의하여 그러한 동방의 축성술을 살려 안티오키아에서 아카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견고한 성이 여러 개 구축되었다. 12세기의 사오누, 마르가트, 그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의 성채가 그 예다. 북프랑스의 가야르 성은 장대한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이러한 형의 성채건축은 13세기를 통하여 더욱더 개량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917년에 파괴된 쿠시성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대지에 세운 걸작이며 그 킵은 지름 31.5 m의 원통형으로 벽의 두께가 기부에서 약 7.5 m나 되었다. 독일에는 바위산 위에 세운 팔켄베르크성이 있으며, 영국의 예로는 [[런던 탑]] · 윈저성 · 에든버러성 등을 들 수 있다. 13~14세기를 걸치며 베일리와 킵으로 나눠져 있던 구조가 해체되고, 해자 바로 안쪽에 기존의 킵의 역할을 한 탑들이 세워지고, 베일리는 오히려 그 킵들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로 변한다. 베일리에 오두막을 세워 분담했던 주방, 마구간 등의 건물들도 킵 안의 건물로 재구성된다. 이런 13~14세기 축성술의 대표 건물로는 보디암 성 등이 있으며, 프랑스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세성으로 유명한 [[귀델롱 성]]도 13세기의 양식을 따른다. 실질적으로 '중세 성' 하면 제일 전형적으로 연상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 [[파일:Fortress_Wall_of_Seoul_and_Heunginjimun_-_the_East_gate.jpg|width=100%]] || [[파일:平遥古城墙.jpg|width=100%]] || || [[서울 한양도성]] || [[중국]] [[핑야오 고대도시]] || [[위진남북조시대]]와 [[몽골 제국]] 및 [[왜구]]의 침입 등을 거치면서, [[동북아시아]]에서도 성의 건축 방식에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과거 [[삼국시대(중국)]][*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까지만해도 [[토성(건축)|토성]]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후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투석기]]같이 성을 직접 무너뜨릴 수 있는 공성무기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토성에 돌이나 벽돌로 보강하거나, 처음부터 석성을 짓는 건축 기술이 등장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대포]]를 주요 무기로 사용한 지역인만큼, 튼튼한 성을 지을 필요성이 매우 컸는데, 그래서 서양에서는 근대 시기에 가서야 [[성형 요새]]를 짓는데 사용된 경사진 벽을 이용하는 방식이, 동양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아서 주로 돌로 성벽을 쌓았지만, [[중국]]은 건축자재로 쓸 석재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주로 흙을 빚어서 구워만든 [[벽돌]]이 주로 애용되었다. [[동북아시아]] 일대는 흙에 [[칼슘]] 성분이 많아서 이것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굉장히 튼튼해지는 데다, 특히 중국은 이런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동북아시아 최고 수준이어서, 성 뿐만 아니라 웬만한 건축물을 모두 이것으로 지었다. [[동북아시아]]는 오랜 옛날부터 중압집권화가 철저하게 진행됐고, 그런만큼 군주를 제외한 유력자의 거처를 방어할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대신, 국경 지대를 포함해 군사적 요충지의 방어에 신경을 쓸 여유가 [[유럽]]에 비해 많았다. 그래서 동양은 예로부터 도시나 마을, 군사거점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wall)이 더 중시되었고, [[자금성]]을 제외하면 군주의 거처가 될 성관(castle)이나 시타델(citadel)의 발전은 다소 미미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경복궁 자체는 조선이 [[중국]] 못지않은 강대국임을 과시하고자 [[자금성]]에 버금가는 거대한 크기로 지었지만, 막상 그 담벼락을 보면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간신히 도둑의 침입만 막을 수 있을 뿐, 외적의 침입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이 [[한양]]까지 임박하자, [[선조(조선)|선조]]가 경복궁을 그냥 포기하고 달아나야만 했다.]. 내부의 반란만 조심하고 외적의 침입만 막는다면 딱히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요소가 없는지라, 굳이 군주의 궁궐을 요새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자금성이나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내성조차도 역할자체는 성관 역할이지만 내부에서 장기간 농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 아니라서, 수도의 외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렀으면 반란군을 상대하는게 아닌 이상, 그 안에서 농성한 게 아니라 그냥 수도를 버리고 영내의 다른 지역으로 달아나버렸다. [[남송]]이나 [[남명]]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물론, [[삼국시대(중국)]]의 군벌이었던 [[공손찬]]의 [[역경루]]나 [[명나라]], [[청나라]] 시기의 [[자금성]]처럼 서양의 성관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는 거처를 지은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당대의 기록에 의하면, [[역경루]]는 10중의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14m)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 위에 망루만 수십 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본인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군량미 3백만 섬을 쌓아두고 장기전에도 대비했기 때문에 성 안에서 [[둔전]]까지 가능했다. 당대의 건축기술과 공사 기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초월적인 규모의 요새였다.][* [[자금성]]은 그냥 그 내부에서 죽치고 농성해도 될 정도로 굉장히 튼튼하게 지은 성관이라서, [[청나라]] 멸망 후에 구 황실에 대한 우대차원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황족들의 자금성 거주를 허락하자,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중심으로 그 안에서 황제놀이하는(...) [[청나라 소조정]]이 설립되기도 했다. 다만, 자금성은 [[중국]] 특유의 [[대륙의 기상]]으로 인해, [[바티칸|성관이 베이징 시내의 미니 도시 수준으로 거대하게 지어졌을 뿐이다]].], 이마저도 나라가 공중분해된 전란기에나 잠시 등장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하고 버려졌다[* 방금 설명한 [[역경루]]도 [[우주방어]]가 가능했지만, [[공손찬]]이 패망한 뒤로는 그냥 버려졌다.]. 아무리 나라 전체가 뿔뿔이 갈라진 난세에도 각 세력이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체제를 잘 갖추었기 때문에, 역시 군주의 거처를 요새화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 [[파일:attachment/Juyongguan-002.jpg|width=100%]] || || [[만리장성]]의 일부인 [[거용관]] || 그런 관계로 등장한 것이 관문인데, 그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축성술의 발달과 함께 성문 자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연구에 신경을 쓰다보니, 성문이 요새화되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관문 내에서 직접 농성이 가능할 정도로, 그 자체가 서양의 포트리스(fortress) 역할을 한 것인데, 지역 전체의 방어보다는 군주나 공화정부의 수반, [[기사단]]의 단장같은 수뇌부의 생존에 더 중점을 두어서 성관(castle)의 요새화에 집중하고 성벽은 시간끌기용으로만 썼던 서양과의 차이가 이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