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건축) (문단 편집) ==== 도시로의 발전 ==== || [[파일:1280px-1_carcassonne_aerial_2016.jpg|width=100%]] || || 유럽 봉건 성채 도시의 대명사인 프랑스의 [[카르카손]] 성채 || || [[파일:핑야오 중국 4.jpg|width=100%]] || || 중국의 [[핑야오 고성]][* 동아시아에서는 유럽과 반대로 도시가 먼저 생긴 후에 성벽이 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 고대 문명권 이후로 수많은 민족의 번성과 폐망, 전쟁등으로 성곽도시(城郭都市) 및 성채의 형태로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여 [[중세]] [[유럽]]시대에 절정을 맞이한다. 서양에서는 봉건시대에 [[장원]]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옛날 성의 이미지로 이미지가 고정된 [[한국]]의 성과는 달리,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도시]]라는 의미다. [[중국어]]로 도시를 '城市'라고 한다.[* [[홍콩 독립운동]]의 지지자들이 [[홍콩]]의 새 국가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하는 노래가 [[https://www.youtube.com/watch?v=_QzRlAwHvFw|홍콩성방가(香港城邦歌, The Hong Kong City-State Song)]]인데, 여기서 '성방'(城邦)이 [[도시국가]]를 뜻하는 말이다. 성(城)같은 건 눈씻고 찾아도 없는 홍콩에서 성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오면, 십중팔구는 자기네 도시 시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서울특별시|한성(漢城)]]은 [[서울성곽|성벽]]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벽을 포함해서 그 안에 있는 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원 화성(華城)도 마찬가지. 이런 성들의 성벽은 방어용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구획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 공통적으로 [[17세기]]까지만 해도 나라를 불문하고 대도시, 권력의 상징이였다. 하나를 지으려고 해도 재료가 많이 들고 인부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자연스레 많아지므로, 성벽의 건축이 웬만한 대형 건물 한두채 짓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자연스레 시골 읍내보다는 권력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나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짓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단어의 어원은 '성(Bourg) 내부에 사는 사람'이다. 성도 건축물이니만큼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가는 데다가,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성 내부에서 거주하게 되면 당연히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거두곤 했는데, 이게 일반 서민들이 부담하기에는 큰 데다가 기본적으로 이런데는 땅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결국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일반 백성들은 성 밖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 내부에는 상공업 종사자, 귀족 같은 소위 '돈 좀 만지는 사람'만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 = 재력 있는 사람 =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재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일본의 죠카마치(城下町) 거주자들의 경우도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일본 전근대 사회에서 [[상인]]들은 마을 사람이라는 뜻의 [[쵸닌]](町人)이라고 불렸다. 일본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처럼 도시에 있는 하기성과는 별도로 산 정상에 독립된 산성을 설치하여, 여기에 다시 혼마루와 니노마루 등을 반복하여 외적만이 아니라 내적들[* [[일본]]의 평민들 역시 [[귀족]]들이 힘을 잃으면 그들을 살해하거나, 약탈하기도 했다. 가령,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황실]]이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왕권마저 바닥을 기던 터라서, 당시 [[천황|덴노]]였던 [[고나라 덴노]]를 보고 백성들이 우습게 여긴 나머지, 동네 ~~잼민이~~애들이 '''덴노의 행차에 돌까지 던지면서 놀려댄 일도 있었다'''.]로부터도 자신들을 보호하였다.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같이 중앙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힌 경우는 봉건 사회와 달리 성의 의미가 권력자의 보호기구가 아닌 행정의 하위 단위에 불과했다. 그런 관계로, [[유럽]]과는 다르게 꼭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읍성]]이라고 하여, 군사적 요충지나 행정 중심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도 성벽이 둘러쳐진 경우가 많아서, 웬만한 경우에는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 안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이 발생했을 때 유럽의 경우는 병사나 가신들 위주의 전투원들 위주로 성 안에서 농성하게 되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는 비전투원들도 입성해 함께 농성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에게 충격을 안겨준 부분이 이것이다. 이미 오랜 옛날부터 고도의 행정 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은 [[조선]]에서는 [[의병]]이라 하여 민간인들이 성 안으로 도망쳐서 무기를 들고 농성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전쟁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에게 극도의 [[멘붕]]을 선사하기 일쑤였다. 일본은 권력자들끼리만의 싸움이 대부분이라 웬만하면 백성들에게까지 전쟁의 화마가 미치는 일은 잘 없어서, 유력자가 사는 곳에만 성곽을 둘려쳐서 보호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영주가 어지간히도 성군이거나 특정 종교의 지도자인 등으로 민심을 얻고 있던 경우나 적들이 엄청나게 잔악무도한 경우가 아니면, 백성들까지 함께 농성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이런 관계로, 조선에서는 물자를 약탈할 만한 민가는 죄다 성 안에 있으니 성 자체를 함락시키지 않는 이상 보급로가 끊기는 비상 상황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도 덤이다. 이는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란 에세이에서 이러한 차이를 흥미로운 관점으로 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