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건축) (문단 편집) ==== 한국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Samnyeon_sanseong4.jpg|width=100%]] || || [[삼국시대]]의 [[삼년산성]] || [[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매우 활발해 실제 전시 방어에 중점을 둔 견고한 성곽도시가 전국 요충지에 건설되었다. 역사에 이름을 떨쳤던 [[난공불락]]의 성채로 [[평양성]], [[대야성]]이 있으며, [[웅진]], [[서라벌]]도 직접적인 공성전이 이뤄진 적이 있었다. 한국의 성들은 전국에 최소 수만개 이상이 지어졌으며, 연해주와 만주, 요동 지역의 성들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현재 사라진 성들만 해도 수천여개 이상이다. 한국의 산성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입보항쟁, 청야입보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사실상 [[청야작전|청야전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왕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들이 산이나 구릉 위에 축조되었으며 왕성이라고 할지라도 구릉 위에 형성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즉, 수도에는 왕성(또는 그냥 왕궁)과 피난용 산성의 시스템을 갖췄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환인의 하고성자토성(추정), [[오녀산성]], 국내의 [[국내성]]과 [[환도성]], 평양의 [[평양성]]과 [[대성산성]]의 구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백제만 보더라도 한성 도읍시절에도 남성과 북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웅진 도읍기는 아에 왕궁이 [[공산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비 도읍기에는 부소산 아래에 왕궁이 있었고 [[부소산성]]은 왕성 겸 도피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월성]] 또한 아에 산성의 범주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산성에는 저장, 저수시설이 필수적이며 실제로 발굴조사에서도 특히 저수시설에 대한 관리는 수차례에 걸쳐 보완되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예 산성이 지방행정의 치소(治所)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되는 경우도 많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산성 유물 중에는 건축 당시 산성의 성벽 높이가 거의 [[보루]]수준인 곳도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당수가 허물어져서 그때의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전방의 국경지대가 아닌 이상 다른 후방의 성들을 유지하는 것에는 소홀해지기 쉬웠고 도시와의 접근성도 낮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지면 관리가 이루어지기 힘든 탓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것도 일제강점기때 일제의 읍성철거령으로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평지성이 [[읍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지어졌는데 외성만 있고 외부와 이어지는 정문이 많이 나있는 데다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서 방어력이 약했다. 읍성은 정규군을 막아내기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앙 권력의 위엄을 높이고 행정 구역 표시, 도적 및 [[왜구]]를 막아내는 것, 즉 치안이 주 목적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적이 처들어오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에서 농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타국의 성들과 비교했을 때 성벽과 성관의 규모가 단촐해보이는 것은 읍성에 그런 구조물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읍성이 있기는 하되 전란이 일어나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허술했던 읍성은 임진왜란 때 이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성전에 이골이 난 일본군에게 매우 쉽게 함락되었다. 기존에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정규군이 주력 방어선인 산성을 돌파해버리자 왜군의 진로에 놓인 읍성들은 빠른 속도로 점령되었다. 반면 대 여진 전선이었던 함경도는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던지라 경성읍성같이 웅장하고 큰 성들이 존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읍성도 기존보다 잘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외적으로 읍성임에도 잘 지어져 여러 방어시설과 내성/외성 구분이 잘 되어있던 [[진주성]]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2차 진주성 전투]]에선 함락당했지만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진군을 저지함으로써 뛰어난 방어력을 보였다. [[조선시대]]에도 일부 산성은 조정의 명으로 새로이 축조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쌓았던 산성들을 재활용하거나 새로이 간단하게 쌓음으로써 왜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산성의 기능이 어떠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어떤 늙은 왜인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장들은 매양 『조선이 [[청야 전술|청야(淸野) 작전]]을 써서 산성으로 들어가고 곡식들을 다른 곳에 옮겨 저장하는 것이 걱정이다. 물길에서 가까운 지역의 산성이라면 10년의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식량 운반이 편리하고 군량을 계속할 수 있으니 기어이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만일 __아주 궁벽한 지역에서 성곽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식량을 쌓아 두고 청야 작전으로 막아낸다면 들에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계속되는 군량이 없게 되어 격파하기 어려울 것__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로서는 큰 걱정거리이다. 』 하며 이를 늘 논의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18일 무신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5018_005|도원수 권율이 적정을 자세히 보고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