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결교회 (문단 편집) == 역사 == 한국 성결교회의 모체는 미국의 찰스 카우만(Charles E. Cowman)와 레티 카우만(Lettie B. Cowman) 부부, 어니스트 길보른(E. A. Kilbourne), 나카다 주지(中田重治)에 의하여 극동지방 선교를 목적으로 1901년에 설립된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이다. 이 선교회는 1901년 일본 동경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창설하고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youtube(cMZXjBztY2I)] 동양선교회는 처음에 교회가 아닌 전도관(mission hall) 전도를 주로 하였으나, 점차 교인이 많이 모임에 따라 교회가 형성되고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도관 내에 성서학원(bible institute)을 세워 하나의 교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원래 동양선교회는 어떤 교단에 소속된 단체가 아니고 복음주의적 신앙동지들로 구성된 선교회로, 창립자들은 감리회 출신이며 그 신학적 배경은 알미니안 계통의 웨슬리안 체험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운 전도표제인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癒)·재림(再臨)의 사중복음(四重福音)은 원래가 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A.B.심슨(A.B. Simpson)의 사중복음, 즉 중생하게 하는 그리스도, 성결하게 하는 그리스도, 치료하게 하는 그리스도, 재림하는 그리스도라는 교리에 근거한 것으로, 이는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사상의 유산이기도 하며, 복음주의사상의 계승으로 볼 수가 있다. 한국 성결교회는 일본 동경에서 동양선교회 소속 성서학원을 졸업한 정빈(鄭彬)·김상준(金相濬) 두 사람이 1907년에 귀국하여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두 사람이 전도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뒤인 1910년에 두 사람의 강력한 요청으로 동양선교회는 영국인 존 토마스(John Thomas)를 초대 감독으로 한국에 파송함으로써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1년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을 창립하였으며, 1921년에 새로운 감독인 길보른이 부임하면서 명칭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바꾸고,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1936년 3월 17일~22일 개최된 제3회 총회에서 교단분열이 일어나 10여개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탈하여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교회 예수증인회|1964년 안상홍에 의해 설립된 곳]]과는 다르다.]를 만들게 되며, 이후 이들은 미국의 나사렛교회와 연합하여 대한기독교나사렛성회를 만들게 된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교회가 강제해산되게 되며[* [[손양원]] 목사처럼 일제 당시 개별 교회나 목사가 탄압받은 적은 많았지만, 유일하게 침례교와 더불어 교단 해체령을 받은 교단이다. 당시 동양선교회 연회록을 보면 창시개명과 국민의례(동방요배와 일제의 승전을 기원하는 기도가 들어간다)까지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직접적인 신사참배 부분에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초기 교단 해산령을 받자 [[https://ko.m.wikipedia.org/wiki/%EC%9D%B4%EB%AA%85%EC%A7%81_(%EB%AA%A9%EC%82%AC)|이명직]] 등이 타협을 시도했다. 심지어 성서가 유대 사상에 기반을 두어 국체에 반한다면서 자체 해산을 발표해버린다.], 1945년 재건총회가 열리게 되고 1949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라는 이름으로 개정된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하여 155명의 교인이 순교하고, 교단의 목회자 다수가 납북되고, 교단의 기반이 사실상 괴멸당하지만, 신도들의 힘으로 기적적으로 재건에 성공한다. 1961년,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동참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게 되며, 이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가 분열되어 독립해 나가게 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통합을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 예성측에서 기성과의 통합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는 교회 연합 기구이다.] 탈퇴를 들었었다. 이에 기성이 [[NCCK]]를 탈퇴하므로써 예성의 많은 교회들이 기성에 합류하여 통합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예성 측에서의 반발로 인해 교단의 완전한 통합은 되지 못한 상황이다. 기성에선 1996년 유아세례가 허용되었다.[* 예성은 헌아식에 준하여 인정한다.] 예성은 2003년 4월, 기성은 2004년 6월 여성안수가 허용되었다.[* 출처:[[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8263|2004. 6. 25. "기성총회, 여성안수 통과·지역총회 폐지 - 높아진 여성 위상 시대조류 반영....선관위원장 선거 '부정' 지적"]]] 2007년 창립 100주년을 기념했다. 2015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웨슬리안교회 국제총회의 준회원(associate member)이 되었다. 기성은 2017년 12월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 창립멤버로 참여했고, 2020년 5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를 탈퇴했다.[* 출처:[[http://www.keh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936|2020. 6. 3.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식 탈퇴’ - 한기총 소속교단으로 오해, 총회에서 탈퇴 공식화"]]] 현재, 한국성결교회연합회 (기성, 예성, 나성의 교류기구)를 중심으로 "한국성결교회"라는 명칭을 공동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으며, 나성은 2018년 총회에서, 예성은 2019년 총회에서 이에 대한 결의를 했다.[* 출처:[[http://goodnews1.com/news/news_view.asp?seq=88121|2019. 5. 29. 데일리굿뉴스 보도 "예성 신임총회장 문정민 목사, ‘한국성결교회’ 공동명칭 사용 촉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